일자리가 최상의 복지다-더 늘어난 팽창예산을 재고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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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팽창예산이라는 비판을 받던 정부의 내년 일반예산(안) 규모가 당정협의 과정에서 오히려 늘었다 한다.
증액된 비목을 보면 민생치안 대책, 도시 저소득층 밀집지역 주거환경개선, 맑은 물 대책, 지역의료보험 지원, 중소기업 공제사업 기금지원 등 녹지대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정부의 주요 기능 중 하나가 가진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그 돈으로 못 가진 사람들의 복지를 늘리는 일인만큼 정부와 집권당이 복지예산을 늘려야겠다는 데는 기본적으로 이론이었을 수 없다.
오히려 예산을 얼마간 늘림으로써 부녀자들이 안심하고 밤거리를 나다닐 수 있고, 밝은 주거 환경에서 깨끗한 물을 마실 수만 있다면 그로 인해 세금이 다소 늘어난다 해도 국민들은 기꺼이 그 부담을 안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번 당정 협의를 통해 늘어난 예산안 증액 내용을 보고 그런 기대를 가질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국민의 구미에 맞을 온갖 항목을 나열해 놓고 기 십억 원, 혹은 기 백억 원씩의 예산을 늘림으로써 정부나 집권당이 국민의 복지를 위해 애쓴다는 흔적만 남겨놓는데 더 신경을 쓰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인상을 갖게 한다.
오히려 내년부터 매년 실시될 지방선거를 위한 선심용·전시용 예산이라는 냄새만 짙게 풍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자리에서 예산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것은 그 같은 예산의 실물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거나 예산의 정치성을 논란의 대상으로 삼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번 팽창 예산의 배경에 도사리고 있는 정부나 집권당의 경제정책 방향에 기본적인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지금 우리경제는 근년에 겪지 않았던 어려운 국면을 맞고 있다.
생산·수출이 둔화되고 공장 가동률이 떨어짐으로써 성장속도가 급격히 저하되고 있다. 기업들은 채산성 악화로 투자의욕을 상실하고 산업공동화 현상마저 우려되고 있다. 이 같은 사대가 장기화되는 경우 가장 심각하게 제기되는 문제는 실업의 증가다. 그 동안의 경기둔화로 이미 실업자가 빠른 속도로 늘고있다.
가라앉는 경제를 일으키고 실업을 막는 길은 민간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정부가 아무리 복지예산을 늘려도 기업이 투자를 확대하고 고용을 늘리지 않으면 실업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은 되지 못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수출회복이나 경기진작을 위한 대책마련에는 계속 냉담한 자세를 보이면서 복지예산을 늘리는데 열을 쏟고 있다.
누차 강조한 말이지만 최대의 복지는 고용이다. 근로자가 일할 직장이 없어지는 경우 정부가 베푸는 복지정책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정부가 아무리 복지를 내세워도 우리는 아직 실업수당 제도조차 마련돼 있지 못한 실정이다. 가령 그런 제도가 있다해도 실업수당을 받는 것보다는 일자리를 갖는 것이 훨씬 행복하리라는 것은 인성의 기본이다.
그런데 지금 정부가 택하고 있는 정책방향은 마치 실업자 증가는 방치하면서 복지정책으로 그 결과에 대처하겠다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우리가 정부의 경제철학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정부의 복지정책 그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야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팽창예산이 여러 사람의 의심을 사고 있는 것처럼 선거대책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정부나 집권당은 돌이킬 수 없는 오류를 법하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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