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구자의 발자취를 따라|박영석 국사편찬 위원장의 연변기행<1>|가슴설레며 둘러보는 만보산|일제 왜곡한 독립운동사 교정|연변대학 등 초정받아 뜻이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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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박영석 국사편찬 위원장이 북경 사회과학원 역사 연구소와 연변대학 초청으로 지난달 2일부터 24일까지 일제하 한민족 독립운동의 피와 땀이 서린 연변지역 일대를 답사하고 돌아왔다. 40년 가까이 독립 운동사를 연구해온 박씨는 『직접 보고 들은 역사 현장의 이야기들을 국민들에게 두루 알리고 싶다』며 여행의 전말을 소상히 기록, 본지에 기고해왔다. 본치는 앞으로 10회에 걸쳐 박씨의 글을 연재한다.【편집자 주】
지금으로부터 꼭 한달전인 8월 2일 아침, 홍콩으로 향하는 비행기 속에 앉아있는 나의 마음은 걱정 반, 설렘반으로 자못 착잡하였다.
1987년 10월에 이미 상해 등지를 다녀온 바 있어 중국 여행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그곳은 우리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나라이며, 또한 천안문 사태가 있은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가슴 한구석에 무겁게 자리잡는 불안감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걱정들을 모두 접어두고도 남을만큼의 보다 큰 기대감도 없지는 않았던 것이니, 그것은 이번 여행일정 가운데 만주지역 (이곳을 중국에서는 동북지역 또는 동삼생이라고 한다) 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40년 가까이 독립 운동사를, 그것도 만주 지역의 독립 운동사를 연구하고 가르치고 했으면서도 그런 독립 운동의 현장을 한번도 답사해 보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 부끄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박사 학위를 받은 논문의 주제가 만보산 사건이었는데, 이번에야 비로소 그 만보산에 가볼 기회가 주어진 것이니 스스로 느끼기에 마치 이제서야 논문을 완성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실 2년전에 중국에 갔을때도 나는 물론 만주 지역을 여행하고 싶었지만 당시 중국내 각 기관과의 끈질긴 교섭에도 불구하고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비로소 북경과 만주 지역으로의 여행이 가능할수 있었던 것은 개인 자격으로 중국 북경의 중국 사회료학원 역사 연구소장 장춘년과 세계 역사연구소 동아 문화 연구중심 주임 풍홍지, 그리고 연변대학교의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개교 40주년 행사>
연변대학은 연변 조선족 자치주 내에 있는 조선인 대학인데 이번에 개교 40주년을 맞아 조선학 국제학술 토논회를 개최케 됨으로써 총장인 박문일과 동대학 부설 조선문제 연구소의 소장인 강맹산 교수가 나를 초청하였던 것이다.
국내에는 없는 자료들을 수집하고 만주에 있는 모든 유적지와 독립운동의 현장들을 둘러보고 싶었다.
또 할수만 있다면 독립운동에 직접 참가했던 생존자들이나 그 후손들과 이야기도 나눠보고 싶었다.그래서 나름대로 여러 가저 계획을 세워보았는데, 사전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야만 주어진 짧은 시간 내에 기대만큼의 성과를 이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무엇보다도 우선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은 만보산 지역이었다. 1931년 7월에 이곳에서 .일어난 만보산 사건은 만주 사변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재만 한인의 토지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사건으로서 재만 한인의 생존권 문제·농업문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체공해 주는 사건이다.

<대성학교도 방문>
앞에서도 밝혔듯이 내가 10여년동안 공부해 학위를 받은 주제가 바로 이 만보산 사건이기 때문에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제일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은 만보산이었다.
만보산을 직접 답사한다면 지금까지 문헌을 통해서만 막연하게 짐작하던 그 사건의 실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확연하게 이해할 수 있을것 같았다.
두번째로 내가 꼭 방문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곳은 봉오동·청산리등 독립 전쟁의 유적지였다.
이곳은 만주의 독립군들이 재만 한인 사회의 절대적인 후원하에 일본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던 유명한 지역이다.
이 양대 전투에서의 승리는 독립군 및 재만 동포들에게 우리도 일본군과의 대규모 정규전에서 승리할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이며, 이같은 의미를 갖고 있는 독립운동의 현장을 둘러본다는 것도 매우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다음으로는 가능하다면 용정지역의 항일 유적지도 방문하고 싶었다.
이곳 용정은 두만강 대안지역인 북간도의 중심 지역이며 또한 1919년 3월 13일에는 대규모의 독립만세 시위 운동이 전개되었던 곳으로 만주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의 근원지였다고 할수 있는 곳이므로 이곳도 빠뜨려서는 안될 것 같았다.
또 마지막으로 방문 계획을 세운 곳은 길림성 영길현에 위치한 신안촌 농장, 삼·일 농장, 영신농장이었다.
이 농장들은 정의부 등에서 활동하였던 이규동 등이 설립하고 운영했던 곳인데, 당시 재만 농민들이 세웠던 농장의 전형적인 예일 뿐만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의 기지이기도 했던 곳이다.
따라서 그곳을 직접 방문해 농장의 규모·위치·거주 인원·시설 기타 여러 가지를 살펴본다는 것은 재만 독립운동의 실상을 밝히는데 크케 도움이 될 것이며 나아가 독립운동의 물적 토대를 밝히는 작업의 일부가 될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이곳도 계획에 넣어 보았다.
그밖에 시간이 허락한다면 백두산 등정도 해보리라고 마음먹었고, 또 독립 운동가 혹은 그 후손들과의 면담 기회도 반드시 가져보겠다는 야심만만한 계획도 세워보았다.
특히 이들과의 대담은 내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독립 운동사를 연구하면서 절실히 느끼게된 한계성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 한계성이란 다름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면서도 우리가 그 자료로서 이용해 온 것이 우리측의 주체적인 자료가 아닌 바로 일본측의 첩보 기록 등이라는 데에서 기인햐는 것이다.

<일제자료에 의존>
따라서 심하게 말한다면 지금까지의 한국 독립 운동사는 일제의 자료에 의한 일제의 식민지 지배사 중 일부였지 진정한 독립 운동사였다고는 볼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일제측 기록에 나오지 않는 독립 운동가들은 설사 독립운동을 했다하더라도 제대로 그 행적을 평가받을 수 없는 비극이 발생했던 것이며, 또한 일제측 자료를 중심으로 연구해온 결과 우리 독립 운동가들의 운동 논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잘못을 종종 범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만주에 생존하고 있는 독립 운동가들과의 대담은 독립운동사 연구에 있어 매우 값지고 귀중한 자료가 될것이었다.
또한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연구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가들에게만 국한되어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관점에서 볼 때 그 곳 연변에는 만주에서 혹은 연안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많이 생존해 있으므로 이들과의 대담을 통한다면 1930∼40년대 만주 항일 투쟁의 본질을 보다 총체적으로 밝힐수도 있으리라고 기대되었다.
어쩌면 무리일지도 모르는 이상과 같은 거창한 계획을 세워놓고 나는 이번의 중국 여행이 나자신에게 또 한번의 새로운 자극제가 될 수 있음은 물론, 더 나아가 모든 계획이 뜻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1910년대부터 해방될 때까지 만주에서 수행되었던 독립운동의 성격을 보다 분명히 살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떠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북경에 도착한 것이 8월4일이었다.
북경 공항에 내리는 순간 그동안 매스컴에서 보고 들었던 천안문 사건이 생각나 괜한 공포감조차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불안감도 잠시, 바쁜 일정에 쫓겨 그런 것은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일정대로 북경에서는 우선 북경대학·중앙민족대학·사회과학원·역사연구소·박물관 등을 방문하고 그곳의 학자들과 환담을 나눈 다음 북경을 떠나 심양·장춘을 거쳐 만보산 지역을 답사하고 영길현의 영신농장도 찾아 보았다.
이어 장춘으로 해서 연변대학에 도착해 학술 회의를 마친 다음에는 연변대학 교수 및 서울대의 신용하 교수와 함께 용정의 항일 유적지와 대성학교 등 항일 학교도 돌아보았다.

<독립운동가 만나>
그리고 봉오동에 이어 두만강에 인접한 도문시를 방문하고 이어서 청산리 지역을 답사하면서 솟구치는 감동을 맛보기도 하였다. 백두산도 등정하였는데 이왕이면 대한 독립단 (단장 유일우는 현 건국대학교 이사장의 조부)의 활동 무대였던 장백현 일대도 두루 돌아보았으면 하고 욕심을 부렸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꼭 가야겠다고 벼르던 유하현 삼원보도 가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 같은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독립동맹에서 활동했던 독립 운동계의 거물 문정일을 만나 그와 대담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처음에 계획했던 것을 모두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나름대로는 보람있고 알찬 여정이었다고 생각하며 그토록 짧은 기일 내에 여러 지역을 답사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지만 중국학자들의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협조에 의해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다.
그분늘께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뜻을 이 지면을 빌려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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