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 씨 사상편력회상기 남로당 최대 비극의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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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야! 섯!』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난데없이 무장경관의 카빈총구가 나의 가슴을 찌르듯이 다가왔다. 50년3월27일 밤 서울동대문 앞에서였다.
순간 나는「이제는 꼼짝없이 갇혔구나」하는 절망감에 눈앞이 캄캄했다.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두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뒤따라오던 정태식도 두 손을 올렸다.
수명의 경관들이 어둠 속에서 뛰쳐나와 몸수색을 시작했다. 이런 순간에도 나는 가죽장갑 안에 감춰진「보고서」가 걱정됐다.
나의 양복주머니에서 큰 악어지갑을 꺼낸 한 경관이 손전등으로 지갑을 비춰보았다. 지갑 속에서는 수 만원의 지폐와「상공부장관 임영신」「서울지방법원 판사 김모」등의 명함이 나왔다. 믈론 이 명함들은 신분보장을 위해 일부러 가지고 다닌 가짜 명함이었다.
무장경관은 그럴듯한 외모에 뜻밖의 장관·판사 명함이 나오자 처음보다는 퍽 공손한 태도로『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명함에 쓰인 대로 광산회사 사장이오. 오늘 상공부에 일이 있어 서울에 출장 왔어요. 뒤에 있는 사람은 우리회사 사원이오.』검은 스키모를 쓴 정태식을 한번 돌아보며 나는 태연히 말했다. 그러자 경관은『아! 광산회사 사장님이 시군요. 조심해 가십시오』라며 지갑을 돌려주었다. 「살았구나」하는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나는 그곳을 무사히 빠져 나와 무장경관이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자 서둘러 장갑 안의「보고서」를 꺼내 발로 밟아 뭉개 없애버렸다.
우리는 종로 5가에서 혜화동 로터리로 가는 한길을 돌아 이화장 앞에 왔을 때 또 한차례 검문을 당했다. 이번에도 동대문 앞에서와 마찬가지 방법으로 무사히 빠져 나왔다.
동숭동 정태식의 아지트에 간신히 돌아와 보니 시간은 벌써 밤 11시가 가까웠다.
『김 선생! 내일 아침 비상 선으로 삼 선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시오.』정태식의 지시였다. 정태식은 나를 김 선생으로, 남로당 지하총책 김삼룡을「삼 선생」으로 부르고 있었다.
당시 나는 남로당지하당 중앙선전부 이론진블록 부책이었다. 그리고 정태식은 바로 나의 상급자인 이론진블록 책임자였다.
50년1월 중순께 중대하고도 긴급한 지시가 당시 남로당 지하총책 김삼룡으로부터 우리블록에 내려왔다. 그것은 평양에 있는 박헌영으로부터의 직접지시였다.
김삼룡이 정태식에게 시달한 지시는「남로당지하당의 남북통일에 관한 정책입안의 건」이었다.
3월27일 밤은 바로 이 지시에 따라 정태식과 내가 만든 보고서를 전달하기 위해 김삼룡과의 접선이 약속된 날이었다.
우리가 동숭동 아지트인 채항석의 집을 나선 것은 오후 6시 조금 지나서였다.
채항석은 수도청장과 초대 외무장관을 지낸 장택상 씨의 사위로 당시 산업은행 계리부장으로 있으면서 좌익에 동조, 그의 집을 우리의 아지트로 제공하고 있었다. 특히 채항석·장병민 부부는 정태식과 나를 거저 먹여주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용돈까지 마련해줄 정도였다.
그날 밤 나는 낙타오버코트에 영국제 신사모를 써 서울에서도 일류신사의 옷차림을 했다. 정태식은 스키모자에다 검은색 점퍼를 입고 나의 심부름꾼 같이 변장했다.
보고서는 엷은 종이에 깨알같은 글씨를 써서 큰 바둑돌 크기로 뭉쳐 가죽장갑 안에 감췄다.
김삼룡은 그때까지만 해도 종종 허름한 일제 방한외투와 방한모를 귀까지 덮어쓰고 건명태 몇 마리를 새끼로 묶은 것을 옆에 끼고 비틀비틀 취객행세를 하며 연락선에 나오곤 했다.
우리는 정각 7시 약속한 신당동 접선지점에 나갔다. 그러나 김삼룡은 커녕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한곳에 머무를 수 없어 근처의 사잇 골목길을 돌며 기다렸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가두연락에서 5분 이상 한 곳에서 기다려서는 안 되는 것이 우리 조직의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최고 지도자이고 중요한 용건이니 그냥 돌아설 수 없었다. 『보통 일이 아니오. 빨리 돌아갑시다.』30분이 지나자 어둠 속에서 정태식의·눈이 번쩍 빛났다. 나도 불길한 예감에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우리들은 허둥지둥 쫓기듯이 동대문 앞에 왔다가 그만 무장경관의 검문을 당하게된 것이었다.
이튿날 나는 우리블록에 속한 세 사람의 부장을 각각 만나 어젯밤 일어난 일은 말하지 않고『김삼룡 동지에게 무슨 사고가 생긴 것 같다. 곧 정보를 수집하여 오늘 다섯 시까지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그날 늦게 김삼룡과 남로당 군사부책임자 이주하가 체포됐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들어왔다. 50년3월27일. 그날은 바로 남로당이 창당 3년여만에 사실상 와해되는 결정적인 비극의 날이 되고 말았다.
뒤에 밝혀진 김삼룡·이주하의 체포경위는 이러했다.
서울시경 사찰과 홍모 경위가 김삼룡의 거처를 알아낸 것은 김삼룡의 비서 김형육 부부를 검거한 직후였다. 며칠간의 설득 끝에 김형육의 부인으로부터 예지동 아지트에 김삼룡이 은신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시경사찰과는 20여명의 형사를 동원해 바로 우리와의 접선약속 전날인 26일 자정 아지트를 습격한 것이었다.
예지동 아지트는「이성희」라는 문패가 붙은 아담한 세 칸 짜리 한옥으로 문간방은 외부감시용 잡화상가게를 차려놓고 있었다. 그런데 밤 12시 수사관들이 담을 넘고 대문을 박차고 들어간다는 게 바로 옆집을 잘못 들어갔다. 수사관들이 한동안 소란을 피우다 정작 아지트에 들이닥쳤을 때는 이미 김삼룡은 도망쳤고 안방에 웬 중년부부가 누워있었다.
그 집은 김삼룡과 이주하가 은신해 있으면서 지하당 본부처럼 쓰고 있었다.
경찰이 들이닥치자 안방의 중년남자는「대한청년단 특별회원」임을 주장했다. 그는 회비영수증까지 내보이며 수사관들과 승강이를 별이다 홍 경위가 나타나자 금방 안색이 달라지며 고개를 떨구었다. 중년남자는 바로 이주하였다.
홍 경위는 원래 김삼룡의 심복으로 서울시당 제1부위원장직을 맡고 있다가 49년9월16일 검거된 뒤 전향, 경찰에 투신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얼굴을 너무 잘 아는 홍 경위 앞에서 이주하의「시치미 떼기」가 통할 리 없었던 것이다. 한편 김삼룡은 그날 밤 수사관들이 옆집을 헛 짚었을 때 아지트 키퍼 이세범의 연락을 받고는 사다리를 타고 뒷집 지붕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그때 담장 위의 철조망에 한복바지가 걸려 찢어지며 다리에 상처를 입었다.
일단 경찰의 포위망을 벗어난 김삼룡은 북아현동에 있는 비밀비서 안영달의 아지트를 찾아갔었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함정에 빠져든 것이었다. 안영달은 49년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김삼룡을 잡아주겠다는 조건으로 풀려 나왔다. 안영달은 교묘하게 양다리를 걸쳐 행동하며 김삼룡이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안영달의 연락을 받은 경찰이 아지트를 습격했다.
수사관들이 방을 덮쳤을 때 김삼룡은 전날 도망치다 다친 다리를 치료받고 있었다. 그는 놀라 도망치려 했으나 곧 체념한 듯 수갑을 받았다.
김삼룡·이주하의 검거는 며칠 뒤 인 4월1일 경찰발표로 처음 일반에 알려졌고 그때서야 말로만 전해졌던 이들의 얼굴이 처음으로 신문지상에 공개됐다.
^<사진>옛 아지트/6·25직전까지 남로당 지하당의 거물 정태식과 박갑동이 아지트로 이용한 서울 동숭동 채항석·장병민 부부의 집. 집주인 채씨는 수도청장과 초대 외무장관을 지낸 장택상 씨의 사위로 좌익에 동조, 정씨 등에게 이 집을 아지트로 제공하고 용돈까지 대주었다. 박갑동 씨 (왼쪽)가 40여년 만인 지난 16일 찾아본 대학로 뒤편의 이 집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최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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