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순 할머니 노점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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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열흘 밤낮을 헤매며 북한에서 내려와 우리정부를 믿고 좋으나 궂으나 살아보려고 애썼는데 길거리 생활40여년에 이제 다시 어디로 쫓겨가란 말인가요.』
23일 오후4시, 1천5백여명의 노점상들이 4일째 농성을 벌이고 있는 서울 명동성당 앞.
농성대열 뒤쪽엔 가냘픈 체구에 구릿빛 얼굴이 온통 주름살로 얼룩진 이원신 할머니(71·서울영등포동)가 왼손에 「노점상도 떳떳한 국민이고 싶습니다」라고 쓰인 피킷을 들고 동료 노점상들과 함께 오른손 주먹을 힘껏 쥔 채 정부의 노점상 무대책 철거를 성토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그나마 노점이라도 해 입에 풀칠할 수 있는 힘을 주신데 감사해 왔는데 그마저 빼앗겠다니 이 자리에 안 나올 수 있겠어요.』
「1·4후퇴」때 혈혈단신 평양을 탈출, 막노동·채소행상·파출부 등 안해 본 것이 없다는 이 할머니는 5년전 서울압구정동 한양슈퍼 앞길에 터를 잡고 1백∼2백원짜리 바늘·실 등을 팔아 하루 5천원의 벌이로 병석의 할아버지(80)와 단칸 셋방에서 하루하루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누가 노점상을 하고싶어 하겠습니까. 가진 것 없어 길바닥에서나마 열심히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우리도 이 나라 국민입니다.』
앞줄에서 한 청년이 목청을 북돋워 노점철거의 부당성을 외치자 이 할머니도 동의한다는 듯 피킷을 흔든다. 『형제 여러분, 길거리에서조차 쫓겨나면 처·자식과 굶어죽어야 하는 절박한 생존의 위기 상황이 우리를 이 자리에 모이게 했습니다. 진군합시다.』
노점상이 던진 돌멩이가 날면서 최루탄이 머리 위를 날아다니자 이 할머니는 가스냄새에 클록이며 안전한 곳으로 종종걸음을 옮긴다.
저녘놀이 지자 이 할머니는 옆자리 40대 아주머니에게 『병석에 누워있는 영감님의 저녁 밥 때문에 먼저 갑니다. 내일 또 올게요』라고 약속하고 작은 보따리를 챙겨 농성장을 빠져나갔다.

<고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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