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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를 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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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내가 종점이에요."

"죄송하지만 무슨 뜻인지?" 선생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나는 선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내 앞에 앉아있던 S가 선생 대신 대답했다. "선생님은 자녀가 없거든요." 그제야 나는 '종점'이란 단어의 의미를 알았고, 선생은 예의 그 아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대신 선생님은 책이 있잖아요. 얼마나 많은 책을 쓰셨는데요. 선생님 아니시면 누가 저희에게 그런 책들을 읽게 해주겠어요." S의 말에 선생은 "부끄럽지요, 뭐"라고 말하며 손사래를 치셨지만, 나는 S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선생은 평생 팔리지 않는 책만 쓰셨다. 연구하고 글을 쓰는 일이야 학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겠지만 선생은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을 좋아해서 하는 사람한테는 못 당해낸다는 말이 있는데, 딱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선생은 책 이야기만 하셨다. 교육에 대한 책, 문화에 대한 책, 인류사를 교육적 관점에서 새롭게 정리해보는 책…. 벌써 수정까지 다 해놓았다는 세 권의 책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선생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S에게 물었다.

"출판사가 손해를 많이 보겠지요? 내 책을 세 권이나 내면 손해가 클 텐데 어디 미안해서 책을 내 달라고 할 수가 있어야지." 선생의 말에 나는 정말 놀라고 말았다. 문학이나 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치고 선생의 책 한두 권 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문학이나 철학 관련의 이론서들은 몇몇 소수 매니어들의 책장에만 꽂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선생 역시 예외는 아닌 모양이었다. 선생은 다시 요사이 쓰고 있는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나이 먹은 사람이 혼자 떠들었다며 미안해하셨다. 어쩌다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서 말을 많이 하게 된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식당을 나와 우리는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일행 중 한 명이 선생과 같은 방향이었다. 그는 선생과 같은 버스를 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선생은 일산까지 말벗을 해준다니 즐거운 일이지만 노인네하고 있는 게 재미있겠느냐면서, 혼자 가겠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도 일행 중 한 명이 버스에 올라타서 선생의 옆 자리에 앉자 선생은 아이처럼 기뻐하셨다. 그 모습에 괜히 코끝이 시큰했다.

그날 밤에는 우연히 홍대 앞의 한 재즈클럽에 가게 되었다. 아홉 시 반이 되자 일흔의 노인들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중절모를 쓴 노인이 무대 중앙에서 클라리넷을 부는데 어찌나 애절하던지,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다 돋았다. 첫 곡이 끝나자 노인은 부끄러워하는 새색시처럼 눈을 아래로 지그시 깔고 다음 곡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뒤이어 드럼 소리가 폭죽처럼 터지고, 노인은 다시 클라리넷을 불기 시작했다. 목에 핏줄이 서고, 두 뺨은 불 붙은 듯 달아오르고, 허리는 뒤로 꺾어지는데, 노인의 그 열정적인 모습에 나는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실내에는 서너 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도 덩달아 일어나 박수를 치고 탄성을 질렀다. 비록 서너 명의 호응이었지만 무대 위의 연주자들은 이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더 열정적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낮에는 여든을 바라보는 노인과 문학을 향유하고, 밤에는 일흔의 노인들이 연주하는 재즈를 들었다. 나이 들면서 찾아오는 최초의 병은 '고독'이라는 앙드레 모루아의 말처럼 노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친구를 잃고 마지막에는 모두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더 슬픈 일은 모두 잃어버리기도 전에 스스로 고독의 사막 속에 묻혀버리는 것이다.

재즈 클럽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나와 또래가 비슷했다. 삼십대의 젊은이들이 일흔 노인들의 연주에 환호할 때, 같은 관심사를 가진 여든 노인과 시간가는 줄 모르고 같은 주제로 대화를 나눌 때, 그런 순간들이야말로 노인과 젊은이가 서로의 황량한 사막 속으로 걸어 들어가 거기, 고독 속에 파묻혀 있던 오아시스를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아시스에서 목을 축였으니 어찌 행복한 날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약력=1973년 서울 출생. 98년 장편소설 '꽃을 던지고 싶다', 2002년 연작소설집 '삼오식당', 장편소설 '나의 이복형제들' 출간

이명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