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친 쌀을 내 쌀에 섞으면 내 것일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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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퀴즈!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쌀 한 되를 훔쳤다. 그리고 자기 집 쌀 한 말에 섞었다. 이 경우 그 집의 쌀은 무죄한 쌀이 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작품에서 내용을 몰래 따왔다. 그리고 자기 작품에 섞어 버렸다. 이 경우 새 작품은 표절에서 무죄한 작품이 되는 것일까?

<img src='/component/htmlphoto_mmdata/200607/htm_200607071501500402000004020100-001.jpg' align=right><b>조금 털렸으니 도둑을 도둑이라 부르지 마라? </b>

최근 한 명의 만화작가가 명예훼손에 의한 손해배상 청구를 받았다. 이 청구의 근원은 만화가의 작품을 드라마가 베꼈는데 그 사실이 인정되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드라마를 고소한 만화가가 명예훼손 혐의로 손해배상을 하라는 법의 판결이다. 이 판결대로라면 무고죄에 가까운 고소였으니 당연히 손해배상을 해야 하지만 내용이 간단치 않다. 고군분투하고 있는 한 명의 작가 또는 만화 분야에서의 일방적 주장이 아닌 저작문화 전반의 근간을 흔드는 그 내용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b>내포(內包) </b>

<img src='/component/htmlphoto_mmdata/200607/htm_200607071501500402000004020100-002.jpg' align=left>이미 관심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이희정 작가의 소송은 자신의 만화 [내게 너무 사랑스러운 뚱땡이]의 드라마 표절을 법에 호소한 사건이다. 드라마 쪽에서는 늘 그렇듯이 ‘그 만화 보지도 않았다’ 버전에서 ‘보긴 봤지만 베끼진 않았다’의 업그레이드 버전, ‘일부 차용했지만 새롭게 해석했다’는 최종 버전의 단계적 변신을 해 왔다. 또한 법정의 판결도 ‘베낀 건 맞네’라고 작가의 손을 들어 주는 듯 했다. 그런데 현실은 여기까지였다.

저작권 침해를 당한 만화가가 손해배상과 공개 사과를 받아도 시원찮을 마당에 반대로 명예훼손으로 손해배상을 해 줘야 한다는 법적 근거 중 하나는 ‘내포’이다. 논리학에 등장하는 어려운 용어로서가 아니라 베낀 것보다는 새롭게 쓴 부분이 더 많으니 베낀 것이 새로 쓴 내용에 포함되었다는 단순 의미의 내포이다. 이전 과정에서 드라마의 만화 표절을 인정하지 않았던 이유들-드라마가 더 교훈적이고 사실적이라거나 새롭게 각색했다거나-도 웃긴 셈이었지만 새롭게 등장한 ‘내포’는 웃음(?)의 압권인 셈이니 이것만 다뤄본다.

<b>내 것을 포기하는 게 내포랴? </b>

‘내포’를 인정한다면 저작문화 분야에는 당장 어떠한 일이 발생할까?

[다세포 소녀]의 작가 ‘B급 달궁’은 이 작품의 캐릭터와 에피소드 몇 개를 영화화 하는 조건의 판권 계약을 맺었다. 이 영화는 ‘내포’의 의미로 보자면 정말 이름 몇 개와 설정을 빌린 것이니 전혀 새로운 작품이 되는 것이고 판권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다. 그냥 가져다 쓰면 된다. [풀 하우스]의 원수연 작가는 그 작품의 이름을 비롯하여 일부 내용을 사용 허락했다. 그렇게 나온 드라마는 만화와 사뭇 달랐고 송혜교 식 ‘풀 하우스’를 만들어 성공했다. 비록 내포였을지라도 당연히 계약을 통해 사용되었던 드라마이다. 사회 일반 정서는 물론 법적 개념에서도 타인의 작품을 내 작품에 이용할 때 그것이 전체 중 일부라도 보호해 준다. 이 보호라는 것은 타인의 두뇌 속 아이디어를 존중하는 것으로 손가락 하나라도 남이 함부로 자르지 못하게 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b>드라마 [궁]은 바보라서 사과했나? </b>

<img src='/component/htmlphoto_mmdata/200607/htm_200607071501500402000004020100-003.jpg' >
‘내포’를 인정한다면 ‘살 붙이기 저작’으로 먹고 살만해 진다. 좋은 이야기를 자기 분야-그것은 만화를 포함한 영화, 게임, 드라마, 연극, 소설 등 모든 저작 분야가 해당-의 창작물로 맘대로 가져다 쓰면 된다. 예를 들어 세 명이 등장하는 잘 된 소설이 있다고 하자. 내포의 범위로 보자면 그 세 명에 처삼촌 붙이고 옆집 강아지 등장 시키고 우여곡절을 몇 개 더 붙여서 만화로 그리면 된다. 억지인 듯 들리지만 과한 억측도 아니다. 영화 [광복절 특사]의 제작 비화를 들어보면 감독이 우연하게 들은 말 한 마디가 시작이었다. 친구가 우스개 소리로 했던 ‘탈옥했는데 특사로 발표되면 얼마나 웃길까?’란 말에 착안해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지만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바로 그 소재를 산다고 거금 500원(?)을 주었다고 한다. 아마 최소의 판권료가 아니었을까? 이 에피소드는 ‘내포’라는 법적 논리가 저작분야의 정서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게다가 창작 분야 중 음악의 경우에는 몇 소절이 같으면 표절이라는 명백한 법규가 있다. 전체가 500마디의 악보일지라도 8마디가 반복적으로 같으면 표절로 본다. 최근 드라마 [궁]에서 네티즌이 작성한 대사를 무단 사용한 것도 문제가 됐고 드라마 측은 잘못을 즉각 시인하고 합당한 처리를 진행 중이다. 이렇듯이 저작권 침해의 하나인 표절은 작게 내포되었든 크게 차용되었든 훔친 것은 불변이다.

<b>작은 소송, 큰 반향 </b>

현재 이 사건은 위에 언급한 것처럼 만화가에게 명예훼손의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이 집행될 순간이다. 한 개인으로서의 만화가 투쟁이 아니라 판결의 결과가 창작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판결이다. 그런데도 당사자인 만화가를 비롯한 창작인들이 소극적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당장에 자기의 일은 아니지만 이것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다. 일간지에 한 줄 실리지도 못하는 작은 소송이지만 이 사안이 갖는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관련 분야의 사람들이 깊은 관심을 드러내야 한다.

만화칼럼니스트 주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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