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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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프랑스 혁명은 혁명의 교과서다. 나라가 어떤 지경에 이르면 혁명이 일어나며, 그 혁명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고뇌와 시행 착오를 겪어야 하는가를 너무도 극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루이」16세 때의 프랑스는 거의 파산 상태에 있었다. 멀리 「루이」14세 재위 중 거듭된 전쟁과 베르사유궁전 건립 등으로 국가의 재정은 말이 아니었다.
나라이 돈이 없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돈을 무한정 찍어내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세금을 올리는 일이다.「루이」16세는 두 가지를 다했다.
1785년부터 혁명이 일어나던 해 (1789년) 까지 인플레는 65%에 달했다. 혁명전후 민중들은 수입의 88%를 빵 값으로 지출해야 했다.
전체 인구의 5%를 점하는 귀족과 성직자는 온갖 특권과 사치를 다 누리면서도 면세의 대상이었고, 95%의 민중이 내는 세금으로 나라의 재정을 충당했다.
결국 왕정은 세제 개혁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안을 토의하는 자리에서 민중대표는 우선 머릿수가 3분의1 밖에 안 되었다. 이들은 「테니스코트 선언」을 통해 「국민의회」의 탄생을 선언했다. 왕은 겉으로는 찬성했지만 속으로는 군대를 동원해 시국은 험해졌다. 그것이 바로 1789년7월14일이었다.
민중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 무기를 탈취하고 감옥을 점령했다. 혁명은 성공이었다. 그러나 혁명은 그때부터였다. 부녀자들의 빵 데모가 일어나는가 하면, 그때까지도 참정권을 갖지 못한 민중들의 저항이 잇 따르고, 주변 국가들에 피신해 있던 귀족들이 반혁명을 책동하고 주변 왕정국가들은 자신의 체제유지를 위해 프랑스 혁명분쇄음모에 나섰다.
국내에서는 혁명세력인 지롱드당과 급진세력인 자코뱅당이 서로 대립, 결국 자코뱅당이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은 「루이」16세의 처형으로 과거를 청산했다.
혁명 4년만인 1894년 국민 의회는 세계사까지도 바꾸어놓은 인권 선언을 채택하고 근대사회건설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혁명은 비로소 국민에게 확신과 비전을 줄 수 있었다. 만일 인권 선언과 같은 장엄한 드라마가 없었다면 프랑스 혁명의 향방은 어떻게 되었을지 장담할 수 없다.
프랑스 혁명의 기승전결이 주는 교훈은 우리에게도 큰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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