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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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50년대 초 중국 영화에 『무훈전』이란 작품이 있었다. 청조 말기에 거지 노릇을 해서 돈을 모아 학교를 세운 산동 출신의 교육자 무훈이란 인물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 영화가 개봉되자 전국의 극장에는 수백만의 인파가 몰렸다.
평소 영화를 좋아한 모택동이 이 영화를 본 것은 물론이다. 영화를 보고 난 모택동은 노발대발,
무견 계급이 지배 계급에 저항한 전형적인 영화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당국은 산동성에 조사단을 파견, 무훈의 행적을 조사케 했다. 그 결과 그 동안 입지 전적 교육자로 추앙 받던 무훈은 빈민을 착취한 고리 대금 업자이며 반동 세력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중국의 문화계에는 일대 정풍 운동이 벌어졌다. 따라서 영화 예술도 모든 사회주의 국가가 그렇듯이 정치 운동에 있어 하나의 도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처럼 질식할 것만 같았던 중국 영화가 80년대에 접어들면서 탈 이데올로기의 물결을 타고 서서히 원상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제5세대로 불리는 젊은 감독들이 대거 등장하여 체제 도전적인 주제를 과감하게 영상화하는 한편 대담한 카메라 워크와 빠르면서도 세련된 커팅 등을 구사, 국제적인 영화제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촬영기사 출신인 장예모 감독의 『붉은 고량』은 88년에 베를린 영화제에서, 오천명 감독의 『옛우물(노정)』은 87년 동경 영화제에서 각각 그랑프리를 수상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중국 영화를 말하면서 거장 사진 감독의 『부용진』을 빼 놓을 수 없다.
중국의 문화 혁명 시대를 배경으로 호남성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어떤 혁명도, 어떤 이데올로기도 인간의 존엄성과 사랑을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에는 여러 유형의 인간이 등장한다. 정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소시민, 우파 지식인, 그리고 새로운 혁명 세력 등. 그러나 「혁명」의 결과는 모두에게 커다란 상처만 안겨준다.
사실적인 기법에 완성도 높은 이 영화는 중국의 대표적 영화상인 백화상과 금계상을 석권했다. 특히 중국영화의 간판스타인 유효경 양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8일부터 호암아트홀에서 개봉된 『부용진』은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중국 영화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난번 북경 사태를 이해하는데도 한 몫을 할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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