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벌운동|숭명배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우암 송시열 (1607∼1689년)의 3백주기를 맞아 우암사상의 현대적 의의를 조명하는 학술회의가 사문학회(회장 이병주) 주최로 23일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다.
이번 학술회의는 17세기 사상사와 정치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우암에 대한 지금까지의 편파적이고 극단적인 부정론을 극복하고 그의 북벌론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시도하고 있어 주목된다.
홍정창 교수(대구대)는 「송자의 북벌론과 민족의식」이라는 발제논문에서 『우암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당쟁과 일제식민사관의 소산』이라고 주장했다.
홍교수는 『효종조의 북벌운동은 실지회복이라는 영토적 의도에서가 아니라 무력에 의해 굴복당한 국권의 회복에 목적을 둔 민족자존의식의 발동이었다』고 강조했다.
또한 이를 뒷받침한 우암의 「화이의식에 임각한 춘추대의의 명분론」 「숭명배청사상」은 한말 위정척사론적 민족사상의 연원이 됐다는 것이다.
즉 숭명은 배청을 위한 명분에 불과할 뿐이며 그 기조에는 민족의 자아의식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이 홍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우암이 사대주의를 철저하게 신봉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대 그 자체는 결코 정권이나 정치가에 대한 평가기준은 될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암이 분명 사대주의 신봉자였지만 그어떤 외세의 힘도 빌리려하지 않았다는점을 중시했다. 만약 우암이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외세와 손을 잡으려했다면 당시 의기충천의 청세력과 손을 잡는 대신 오히려 그 세력을 의식적이고 노골적으로 적대시하고 멸망직전의 명을 숭배했겠느냐는 것이다.
홍교수는 우암이 숭배한 것은 명으로 상징된 성현의 도일뿐 명왕조 자체는 아니었다고 해석했다.
우암을 당쟁의 화신으로 인식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그는 『당쟁자체를 잘못 인식한데 기인한 생각』이라고 비판했다.
조선시대의 당쟁은 정권 그 자체를 노리는 부정적인 측면만이 강조되어 왔지만 실은 국왕이 당시의 절대척인 헌법에 해당하는 유교척 통치이념에 어굿나지 않도록 보우해야 한다는 명분아래 전개된 정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암은 자신과 추종자들에게 치명적인 참화가 미구에 닥쳐올 것이라는 예견을 가지면서까지 생사여탈권을 가진 국왕(숙종)의 뜻에 어굿나는 상소를 올리는등 영리당략적 차원을 초월한 인물이였다는 것이다. 「우암의 경학사상」을 조명한 최근덕교수(성대)도 우암의 북벌사상은 침력이나 무력행사의 사상이 결코 아니며 호란에 대한 복수인 동시에 청에 대한 군신·주종의 불평등에 대한 민족자주자존의 표현이며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민족적 저항정신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또 이는 한말 사람들에게 이어져 위정척사로 나타났으며 기미 3·1정신에도 그대로 계승된 민족자주의식이라고 강조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