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직원이 90억 빼내 탕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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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농협 직원들이 국가정보원 측이 예치한 거액의 자금을 불법 인출해 주식 투자 등으로 탕진한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북부지검 형사6부는 국정원 전.현직 직원들이 가입한 상조회의 계좌에 들어 있던 90억원을 빼돌린 혐의(횡령 등)로 전 농협 직원 지모(59)씨와 최모(45)씨를 구속 기소했다고 26일 밝혔다. 검찰은 현직 직원 김모(37.여)씨의 범행 가담 여부도 수사 중이다.

◆ 어떻게 빼돌렸나=검찰에 따르면 지난해 6월 퇴직한 지씨는 서울 면목역지점에서 근무하던 2000년 8월과 2002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직장 후배 최씨(2000년 11월 퇴직)와 공모, 국정원 상조회의 정기예금 계좌에서 각각 60억원과 30억원을 몰래 빼낸 혐의다. 당시 국정원 상조회는 J.D 등 단체 이름으로 된 차명계좌를 사용하고 있었다.

지씨는 국정원 측 돈에 손을 댄 경위에 대해 "부하 직원이던 김씨가 고객에게 대출해 준 1억원을 날려 주식 투자로 손실을 보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검찰 관계자는 "지씨 등이 빼돌린 돈 가운데 37억원은 주식 투자로 날렸으며, 30억원은 모 사업가에게 개인적으로 빌려줬고, 나머지는 은닉.유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지씨는 농수축협 통폐합 이전인 1998년 축협 지점장으로 근무하던 시절부터 국정원 측 계좌를 전담 관리했기 때문에 상조회가 거액을 일시에 인출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범행에 이용했다는 것이다.

지씨 등은 2004년 상조회가 정기예금을 보통예금으로 전환해 달라고 요청하자 횡령 사실을 숨기려고 가짜 통장 세 개를 만들어 주면서 원금과 이자 등 모두 120억원이 예치된 것처럼 꾸미기도 했다. 국정원 측은 통장과 인감도장을 직접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횡령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상조회가 거액을 인출하려는 과정에서 '이상 징후'가 드러나 농협에 이를 통보했고, 농협은 지난달 9일 잔액을 확인해 횡령 사실을 확인했다. 농협은 지난달 17일 면목역 지점장 명의로 지씨 등을 검찰에 고소했다. 농협 측이 현재 환수한 돈은 10억여원에 불과한 것으로 전해졌다.

◆ 당혹스러운 국정원=국정원은 이번 사건이 자칫 '국정원 비자금' 사건으로 비춰질까봐 신경 쓰고 있다. 검찰은 "사안의 성격상 예금의 성격과 출처는 조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문제의 예금이 국정원의 비자금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정원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상조회 예금을 농협 직원이 횡령한 금융 사고"라며 "이 돈이 국정원 예산이라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했다. 농협 관계자는 "횡령 사실을 확인한 후 곧바로 관련자들을 고소하고 금융감독원에도 신고했다"며 "단순 개인 횡령사고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농협 측은 지씨가 국정원 예금을 관리하게 된 배경에 대해선 함구했다.

정강현 기자

◆ 국정원 상조회=1970년 비영리 사단법인 형태로 설립됐으며 모든 국정원 직원의 월 급여에서 10만여원씩 떼어 기금을 만든 뒤 퇴직 때 지원금을 주고 있다. 2001년엔 수익사업 차원에서 강원도 원주의 파크밸리 골프장을 500억원에 인수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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