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훈한 삶」에서 찾아낸 인간의 꿈"|외피의 미보다 내면의 진실 추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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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박항섭의 그림에는 아름다운 꽃 그림이나 아름다운 풍경이 없다. 때때로 수줍은 시골 소녀나 여인상은 등장하지만 예쁘게 가꾸어진 미인도는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그의 그림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아름다움이 박제된 것이 아니라 훈훈한 삶의 열기 속에서 찾아진 리얼리티에 있다는 것이다.
한 예술가의 전체상은 일정한 시간의 거리를 통해서 보다 선명하게 접할 수 있다. 박항섭의 10주기 회고전에서도 단편적이었던 예술가의 이미지가전체로 되살아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당대의 예술가들이 습관적으로 추구했던 틀 잡혀진 소재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인간의 삶의 모습에, 그러한 삶에서 엮어진 인간의 꿈을 그리려고 했다. 그래서 그의 화면에는 외피의 아름다움보다 내면의 진실이 조형적 욕구로 점철되고 있다.
그의 대부분 작품들은 따라서 인간의 이야기인 셈이다. 여인·모자·가족, 또는 군상이 단순한 모델로 등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정감이 모티브로 등장되며 그것이 발전되어 인간 삶의 실화를 창조하고 있다.
이 같은 설화적 분위기는 선사시대나 신화시대 같은 일종의 관념화된 태고적 비전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설화적 모티브는 박항섭 특유의 기법과 서로 교직되면서 이른바 박항섭 스타일을 만들고 있다.
그의 작품은 어떤 사물을 완전히 잘라 보여주는 단면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화면은 마치 화석을 보는 것 같은 강한 표면성을 드러낸다.
오랜 세월 돌 속에 각인 된 조류나 어류의 단면을 보는 것 같은 매끄러운 표면 속에 미세하게 아로새겨진 상형이 펼쳐진다. 어족류가 많은 것도 어떤 필연성을 띤 것 같다.
미묘한 선묘의 복잡한 구성 속에 암시적으로 떠오르는 형상의 묘출 방법은 작품을 세부적인 집착에 몰고 가는 요인도 된다.
1백점 가까운 작품 속에 대작이 적고 소품이 많은 것도 이 같은 기법적 요인과 관계 될 것이다.
스케일보다는 뉘앙스에 집착한 작가적 기질이 대작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웅대한 맛은 없으나 작품 구석구석에 가해진 표현의 밀도가 내면적 깊이를 더해주고 있음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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