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신] 아프리카, 검은 민들레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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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7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던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해 유럽과 아시아로 퍼졌다고 주장하는 인류학자들이 있다. 유전자를 분석해 보면 현대 인류가 모두 이 당시 동아프리카 지역에 살던 약 1만 명의 인간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이다.

최근 BBC 뉴스 인터넷판은 혹심한 가뭄과 기근이 아프리카인들을 이동하게 한 것으로 본다는 미국 과학자들의 학설을 소개하기도 했다.

오늘날 인류가 존재하게 된 것이 이런 가뭄 속에서 살아남거나 물을 찾아 멀리 떠난 소수의 조상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아프리카에 남아 혹독한 환경을 이겨낸 사람들은 고도의 생존력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인류학자들이 주장하는 7만 년 전 인류의 대이동은 인류의 역사와 지구의 역사를 결정한 대사건이다. 그런데 지금 지구촌의 축구 역사를 뒤바꿀 만한 대이동이 쉴새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프리카인의 유럽 진출이다.

아프리카 선수가 뛰지 않는 리그나 아프리카 선수가 없는 클럽은 거의 없다. 드로그바(코트디부아르), 에시앙(가나.이상 첼시), 아데바요르(토고.아스날) 등은 슈퍼스타들이다. 한국의 다음 상대인 프랑스의 주축 선수들도 아프리카계 이민자이거나 그 후손들이다. 스위스에도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수비수 요한 주루가 있다.

척박한 대지 위에서 공을 차던 아프리카 선수들은 축구화 한 켤레에 꿈을 싣고 지중해를 건넜다. 꿈은 때로 이루어지고 때로 좌절됐겠지만 이들의 유럽을 향한 걸음은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아프리카 축구는 언젠가 세계 축구의 지형을 바꿔 놓을지 모른다. 언젠가는 아프리카팀이 월드컵을 제패할 것 같다. 이르면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 '혁명'이 일어날지 누가 아는가.

이어령 선생은 '축소 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을 쓸 무렵 한 텔레비전 방송의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민족을 민들레에 비유한다.

고개를 숙인 채 바람에 흔들리는 민들레의 꽃씨가 먼곳으로 날아가 또 다른 군락을 이루며, 한민족의 확산은 고난의 형태로 시작됐으나 세계 곳곳에서 깊이 뿌리를 내린 채 억척스럽게 살아가고 있다고. 이선생은 또한 문학평론가 김윤식씨와의 대담에서 자신이 주목한 것은 민들레의 꽃씨 자체가 아니라 꽃씨가 간직한 생명력이었노라고 말했다.

기아와 분쟁, 밀림과 야만의 이미지가 선명한 아프리카. 그러나 고요 속에 잉태된 원시의 생명력은 시간의 조탁을 통해 새로이 태어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문화가 삶을 표현한다면 문화의 일부로서 축구는 아프리카의 잠재력과 생동감을 표현하고 있다.

독일월드컵에서 아프리카의 출발은 좋지 못하다. 조별리그 1차전에서 1승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월드컵은 이제 시작일 뿐이고 아프리카 축구의 가능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월드컵은 아프리카의 검은 민들레들로하여금 세계를 향하여 꽃씨를 날려보내게 하는 힘찬 바람과도 같다.

허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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