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홍명보팀' 지금은 '박지성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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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고전 때 발을 약간 다친 박지성이 15일(한국시간) 회복 훈련 때 경기장 한 쪽에 앉아 훈련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레버쿠젠=오종택 기자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대표팀은 '홍명보의 팀(홍팀)'이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대표팀은 '박지성의 팀(박팀)'이다.

▶'홍팀'은=수직적인 위계 질서에 바탕을 둔 조직이었다. 당시 팀 내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경험도 풍부한 홍명보가 주장을 맡았다. 월드컵 4회 연속 출전이라는 '훈장'을 단 홍명보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팀을 일사불란하게 이끌었다. 당시 스물한 살의 막내 박지성이 홍명보와 같은 방을 쓰게 됐다. 그는 하늘 같은 선배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저기요"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수들은 중.고.대학을 거치면서 상명하복, 단체 얼차려 같은 '질서 유지 수단'에 길들여져 있었다. 2001년 부임한 거스 히딩크 감독은 이런 수직 질서의 부정적인 면을 고치고 싶어했다. 그는 선수들을 식당에 모아놓고 "선배끼리, 후배끼리 모여서 밥 먹지 말고, 섞어 앉아서 먹어라. 그리고 훈련과 경기 때는 서로 이름을 불러라"고 지시했다. 순간 분위기가 어색하고 냉랭해졌다. 선배는 황당했고, 후배는 당황했다. 이때 김남일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명보야, 밥 먹자." 좌중에 웃음보가 터졌다.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박팀'은=수평적인 조직이다. 박지성(25.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은 대표팀에서 중간 나이다. 주장 이운재보다는 여덟 살, 최진철보다는 열 살이나 적다. 그렇지만 박지성은 팀의 중심이다. 선수들도 이를 인정한다. 나이.관록 같은 '과거'보다 어떤 팀에서 뛰고 있으며, 어느 정도 실력을 보여주느냐 하는 '현재'가 중요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백지훈은 "역시 프리미어리거는 다르다. 지성 형과 함께 뛰면 든든하다"고 말했다. 한 고참 선수는 "지금 대표팀을 '박지성의 팀'이라고 불러도 되겠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불러도 될 정도로 지성이의 비중이 크다"고 했다. 이번 대표팀은 고참과 신예가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장난도 잘 친다.

박지성의 겸손하고 한결같은 태도도 그를 중심으로 선수들이 뭉치는 바탕이 된다. 그는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스타지만 훈련 때는 동료와 함께 골대를 들어 옮긴다. 그는 독일에 온 뒤 인터뷰에서 "나는 11명의 선수 중 하나일 뿐이다. 나만 막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팀의 한계는 박지성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보니 그의 컨디션에 따라 팀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박지성이 부상과 피로 누적으로 부진했던 스코틀랜드 전지훈련 기간에는 대표팀의 경기력이 떨어졌고, 선수들의 사기도 높지 않았다. 수비수인 홍명보는 그라운드에서 전체 선수들을 지휘했지만, 공격수인 박지성이 그런 역할까지 할 수는 없다.

홍팀은 2002년 4강 신화를 창조했다. 박팀은 토고를 꺾고 신화 재현의 첫발을 내디뎠다. 토고전 두 골 모두 박지성이 중앙을 휘저어 만든 기회를 동료가 마무리지은 것이다. 축구 대표팀에 부는 변화의 바람과 그 결과를 지켜보는 것도 이번 월드컵의 또 다른 재미다.

레버쿠젠=정영재 기자 <jerry@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jongta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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