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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 영어교육 확대 반대… 국적 없는 인간 만들려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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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요즘에는 초등학교 1, 2학년 어린이 10명 가운데 7명이 영어 사교육을 받고 있다고 한다. 최근 한 인터넷 사이트 설문조사에 따르면 총 1218명의 응답자들 부모 53%가 만 3세 이전에 영어교육을 시키고 있으며, 태교 때 시작한다고 답한 응답자도 꽤 있었다. 유아 영어학원의 월평균 수강료는 40만~70만원 선이고 심지어 원어민 수강료는 100만원을 훨씬 웃돈다고 한다. 영어학원 수는 10년간 두 배가량 늘었고, 시장 규모는 10배 정도로 커져 연간 10조원 정도(우리나라 2006년 교육인적자원부 예산은 약 32조원)로 파악되고 있다.

또 지난해에 우리 초.중.고교생의 조기유학생 수가 사상 처음으로 7000명을 넘었다. 여기에 영어 발음을 원어민처럼 유창하게 하기 위한 혀수술까지 받는다는 현실을 덧붙이면, 우리 국민 모두가 조기 영어교육 열풍으로 여러 면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국력을 낭비하고 있는 셈이다.

이 모두가 10년 전 1997년에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를 거의 준비 없이 가르쳤기 때문에 생겨난 국력 낭비 현상이다. 주당 한 시간 교육은 집중교육이 필요한 외국어 교육에 별 도움이 안 되고 사교육 시장만 확대한 꼴이 됐다.

교육부는 지난달 초등학교 1, 2학년 영어교육 시범 실시학교 50곳을 발표했다.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교육부는 이번에도 사전 의견수렴 과정 없이 실시 계획을 발표했다. 실시 이유는 영어교육을 내실화하라는 사회적 요구 때문이란다. 게다가 교육부는 이러한 조기 영어교육 확대가 사교육의 사각지대인 농어촌이나 도시 빈곤층 학생들에게 기회를 제공해 양극화 현상을 줄일 수 있다고까지 주장하면서 10년 전에 시작했던 조기 영어교육의 실패를 은폐하고 있다.

그러나 조기 영어교육 확대는 '오히려' 계층 간 격차를 심화할 것이다. 효과 없는 주 한 시간 영어교육은 사교육 의존도를 높이고, 그래서 부모의 재력이 자녀의 영어 실력을 결정하는 상황을 확대 재생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 조기교육에 반대하는 더 큰 이유는 그것이 우리 미래 세대의 자기 정체성과 주체성 형성을 방해해 국적 없는 인간을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화 시대에 필요한 것은, 생각은 세계적으로 하더라도 발은 우리 땅을 딛고 일어서는 태도다. 영어를 외국어로 가르치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영어교육 과정에서 발생하는 언어제국주의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게다가 언어학자들 간에도 외국어 학습이론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며 그 어느 이론도 과학적으로 언어습득 과정을 완전히 입증하지 못한 상태다. 예를 들어 40~50년대의 행동주의자들은 언어 습득을 습관 형성으로 여기며, 그래서 빨리 외국어를 시작하면 더 빨리 습관이 든다고 믿는다. 그러나 60~70년대의 생득주의자 혹은 합리주의자들은 인간이 천부적으로 언어습득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 인지적 과정을 통해 언어를 배운다고 주장한다. 최근의 구성주의자들은 언어는 표현하기를 원하는 언어의 기능을 중심으로 발달하기 때문에, 학습자는 필요에 따라 입력된 정보를 재구성해 사용한다고 본다. 행동주의 이론을 제외하고는 어느 이론도 조기교육의 효율성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

이제 더 이상 온 국민을 영어에 주눅 들게 만들지 말고, 필요에 따른 영어 집중교육을 해야 한다. 2004년 자료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국어 실력은 100점 만점에 30점도 안 된다고 한다. 효과 없고 국력 소모적인 초등학교 영어는 폐지하고 중학교에서는 회화 중심, 고등학교에서는 문법과 읽고 쓰기의 기초를 닦고, 대학에서는 전공영어에 집중하는 영어교육 체제 구축이 시급하다.

박거용 상명대 영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