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칼럼

역사적인 대통령 정말 맞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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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선거는 끝났지만 변한 것이 없다. 대통령은 결코 변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수차례 피력했고, 뜻밖의 대승을 거둔 야당은 부자 몸조심하느라 몸을 사리고 있다. 국민은 표를 던졌지만 반응이 없는 것이다. 이 정권은 스스로 참여정부라고 이름 지었다. 참여의 핵심은 선거다. 그렇다면 국민 모두가 참여한 선거의 결과를 국정에 반영하는 것이 참여정부가 할 일이 아닌가. 그러나 대통령은 이번 선거가 '민심의 흐름'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했다.

"옳은 주장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니다. 선거에 졌다고 역사 속에서 역할이 틀린 것은 아니다"고 대통령은 말했다. 이번 선거결과가 역사적인 의미에서 볼 때는 잘못된 것이라는 뜻인 것 같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정말로 헷갈린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옳은 대통령을 모시고 있는데 우리가 우둔해 못 알아보는 것은 아닐까. 혹시 훗날 "노무현 대통령이 그때 옳았다"는 역사적 평가는 없을까. 역사적인 지도자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부끄러운 국민이 될까.

그렇다면 역사적인 지도자와 그렇지 않은 지도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리더십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의 과제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역사적인 지도자라면 여러 가지 덕목을 지녀야 하겠지만 최소한 다음 몇 가지는 반드시 갖춰야 한다고 믿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을 통합시키는 사람이다. 찢어지고 갈라진 국민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노예해방을 둘러싸고 분열된 미국을 통합시킨 링컨 대통령 같은 인물이다. 또 극심한 인종차별의 나라에서 대통령이 돼 원한을 잠재우며 대화합을 이뤄낸 만델라 같은 인물일 것이다.

역사적인 지도자는 국민과 더불어 위기를 극복한 인물이다. 지도자 혼자 힘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귀 기울여 국민과 한 몸이 돼 이를 극복해 낸다. 미국의 대공황 위기를 극복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같은 인물일 것이다. 5.31 선거에서 우리 국민은 '나라가 이런 식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에서 투표를 했다. 그 결과 1000만 대 400만이라는 엄청난 표 차이가 났다. 그러나 "선거에 한두 번 졌다고…"라며 대통령은 선거 결과를 무시했다. 위기라고 외치는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닫는 대통령을 역사적 인물이라고 할 수 없다.

역사적 지도자는 창조적 비전을 가진 인물이다. '진리와 사랑 혹은 비폭력'이라는 의미의 '사티아그라하'를 내걸고 그 비전으로 인도를 독립으로 이끌었던 간디 같은 인물이다. 역사적인 지도자는 그렇기 때문에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는 사람이다. 선거 결과를 보고도 현충일에 "부끄러운 역사…"하며 과거에 매달려 있는 대통령을 역사적인 지도자라 말하기 힘들다. 이렇게 역사적 지도자와는 거리가 먼 행동을 하면서 역사를 말하는 대통령을 어떻게 봐야 할까.

스스로가 역사적 판단을 하고 있다고 믿는 대통령은 현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믿음 때문에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남은 1년 반은 허송세월로 보내기 십상이다.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긴 날들이다.

역사를 강조하다 보면 엉뚱한 길로 빠질 수 있다. 착각과 오만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의 개혁파라는 사람들은 "개혁이 미흡해 패배했다"고 한다. 그 개혁의 실체는 좌파정책이다. 더 왼쪽으로 나라를 끌고 가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대통령은 남은 임기 동안 역사적인 큰일을 한다며 나라를 소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

남은 1년 반이 지나간 3년 반만큼이나 고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제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국민의 역량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성과는 국민이 포퓰리즘을 거부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은 좌파 포퓰리즘이 판치는 남미가 아니었다. 이 정권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 서울과 지방, 강남과 강북을 갈라 놓으면 표가 쏟아질 줄 알았다. 언제나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이 많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국민은 그러한 분열의 꾀에 넘어가지 않았다. 소수는 바로 집권층 자신들이라는 점을 알려 줬다. 5월 31일로 국민은 달라졌다. 혼자가 아니라 다수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우리 국민의 역사인식이 승리한 것이다.

문창극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