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서 빠진 정보기관 안테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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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문익환목사가 평양에 간지 5일째가 되건만 정부는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에서 깨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국민들은 온통 불안과 불만에 싸여있는데 정부는 기껏 돌아오면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구속하겠다는 말을 할 뿐 그가 언제부터 누구와 접촉하여 어떤 경로로 평양엘 갔는지 책임있는 규명을 못하고 있다.
더욱 한심한 것은 문목사 일행의 평양에서의 활동은 거의 북한방송에만 의존해 파악하는 기색이며 국가정보망은 작동불능 상태가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준다.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안기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문목사의 평양행 제1보를 접한 직후 가진 정부대책회의에서 안기부 관계자들은 문목사의 욕만 하고있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 후 활동은 매일 북한이 대외선전용으로 방영한 VTR를 구해다 관계기관에 배포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듯 하다.
한때 북한측과 접촉하는 채널이 여럿 있다고 공언한 정부관계자들도 침묵만을 지키고 있다.
안기부는 국회가 안기부의 기능을 축소하고 예산을 깎는 입법조치를 하려했을 때 지난 시대의 국내정치 개입을 반성하고 앞으로는 대외활동과 남북관계에만 전념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국회는 기구와 예산에 손대지 말아달라는 안기부측 요구를 긍정적으로 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목사는 안기부와 우리의 정보망을 여지없이 비웃었다. 미CIA와 소련KGB가 벌이는 고차원의 정보전에는 못 따라가더라도 동족끼리 펼치는 남·북한관계에서만은 독보적은 아니더라도 어느 「수준」은 지켜야했을 것이다.
더욱이 황석영씨는 방북 의사를 이종찬 민정당사무총장과 만난 자리에서도 사전타진 한바 있고 문목사도 김대중씨를 비롯, 여러명에게 언질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 말을 듣고 『정부측과 상의하라』고 조언한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도 문제지만 이런 논의가 안기부의 안테나에 전혀 잡히지 않았거나 잡혔어도 신속히 처리하지 못했다면 문체가 아닐 수 없다.
이번에도 모든 책임을 민주화 탓으로 돌리고 어물어물 넘어간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또 생길지 걱정스럽다.
이규진<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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