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압인가 폭행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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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찢어지는 비명과 고함, 깨지고 부서지는 집기 위로 난무하는 주먹과 발길질.
22일 오전「한국피코」(부천소재)근로자들의 조선호텔 내 미 상공회의소 점거농성은 경찰의 전에 없던 초 강경 진압으로 아수라장이 된 채 삽시간에 끝났다.
점거첩보를 사전에 입수 못했던 분풀이라도 하듯 농성시작 10분만에 무자비한「폭력작전」이 감행됐다.
『족쳐버려-.』
『닥치는 대로 비틀어 끌어내-.』
간부들의 잇단 호통에 합판 벽까지 부수고 들어간 1백여「국민의 공복」들은 저항하는 부녀자들을 마구 두들기며 잡아채 끌어냈고, 청년들은 무차별 발길세례에 고꾸라진 채 복도를 나뒹굴었다.
10여분 뒤 호텔 옆 마당. 『도망간 양놈사기꾼 불려오라는데 이럴 수가….』3층 농성장에서 짐짝처럼 끌려내려 온 여성근로자들이 산발한 채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4천1백원의 일당으로 한국인들을 부리던 악덕 미국인사장 오코넬」과 부사장은 임금을 체불한 채 지난달 말 회사자산을 모두 챙겨 달아났다.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어요. 모두들 굶게됐죠.』『청와대와 미대사관에 수차 대책을 호소해도 허사였어요.』
눈이 휘둥그래진 채 아비규환의 현장을 지켜본 호텔 내 수많은 미국인들의 눈에「미국인 때문에 빚어진 한국민 끼리의 무참한 충돌」은 어떻게 비쳐졌을까.
박살난 농성장에는「이 땅이 뉘 땅인데 돈 떼먹고 도망가나」라고 쓰인 주인 잃은 피킷이 온 몸으로 분노를 뿜어내고 있었다.

<김석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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