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의 문명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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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보행자들이 분주히 왕래하는 골목길을 승용차가 비집고 들어서서 빵빵 경적을 울리면 사람들은 마치 잘못을 저지르다가 들키기나 한 것처럼 양옆으로 몸을 움츠리며 비켜선다. 그러면 대개 한두 사람밖에 안탄 승용차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 트인 길로 속력을 내 달려나간다.
이런 불쾌한 경험은 도시의 보행자 치고 하루에도 수 없이 겪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모두들 용케도 잘 참는다. 이젠 거의 습성처럼 되어 으레 차란 보행자보다 도로 사용상의 우선권을 가진 걸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이제 대도시에는 즐거운 산책로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원리를 따져 보면 도로를 이용할 권리는 납세자인 국민 모두에게 골고루 있는 것이다. 차를 탄 소수나 차를 위해 길을 비켜 주는 다중이나 같은 권리를 나누어 갖고 있는 것이다. 인도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골목길에서 차가 보행자에 우선해야 할 이유는 적어도 도로사용권의 측면에서는 조금도 없다.
또 차도에서는 자전거나 수레, 소형 자동차나 대형 자동차가 동 등한 도로 사용권을 갖고 있다. 그런 원리를 놓고 볼 때 문명 된 도로 사용법은 차 권보다 보행 권을 잘 보호하는 순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그 정반대다. 가장 보호받아야 할 보행자가 가장 밀리도록 도로가 짜여져 있고 교통관습은 큰 차가 작은 차를 멋대로 밀어붙이는 것이 당연한 권리인양 횡행하고 있다.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수가 1만 명을 넘어서고 있는 수치스러운 기록의 주원인도 아마 그런 도로상의 무법상태 때문일 것이다.
교통질서가 세계에서 가장 잘 지켜지고 있는 영국의 경우 도로의 공용성은 제도화되어 있다. 정부가 발간하는 운전 법은『도로 사용법』이라는 제목의 책자 맨 뒷부분에 씌어져 있다. 맨 앞에는 보행자의 권리와 의무, 그 다음에는 자전거의 권리와 의무, 그런 순서로 가장 약하고 그래서 가장 보호되어야 할 도로사용자 순으로 도로사용의 수칙들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거리에는 차가 경적을 울릴 경우 경고의 필요가 있을 때만 한정되어야지 보행자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다른 차를 규탄하는 목적으로 빵빵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런 도로 관을 우리가 지향해야 할 도로 사용법이라고 수긍한다면 우리의 교통 관행은 약육강식의 정글 법이 지배하는 야만스러운 것이다. 도로를 따라가 보면 보행자의 도로사용권은 아예 무시되어 있는 곳이 허다하다.
아예 인도는 없고 차도만 있는 곳, 인도가 형체만 있어 두 사람이 서로 엇갈려 지나가기 어려운 지점, 인도가 주차장으로 남용되고 있는 곳, 점포의 진열장이 인도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곳 등 이 수없이 보행자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
교통 당국은 차량의 소통에만 신경 쓰지 말고 도로 사용의 기본원리에 입각해서 절대 다수의 시민들이 겪고 있는 보행의 고통을 덜어 주는 노력을 해야 된다. 도로상의 문명화야말로 사회 전체의 문명화 척도가 된다는 자각을 당국과 국민들이 다같이 인식할 때 도시 거리의 산책은 다시 옛날처럼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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