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가리고 아웅"식 통화 관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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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통화 지표에 잡히지 않는 「유령 통화」인 이른바 「타점권」이 다시 급증, 많은 부작용과 고통을 감수하면서 애를 쓴 통화 관리를 한갖 「숫자놀음」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타점권이란 다른 은행 점포에서 발행된 당좌 수표를 말하는 것으로 타점권의 은행간·점포간 교환 결제에 하루가 걸린다는 점을 이용, 실제로 나돌아다니는 시중 뭉칫돈의 양은 하나도 변함이 없이 통화 지표만 늘리거나 줄이는데 쓰이는 「유령 통화」다.
예컨대 지난 2월처럼 은행 창구를 직접 죄어 잡는 여신 한도 규제 방식의 통화 긴축이 강행될 경우, A·B·C 3개의 은행과 당좌 거래를 맺고 있는 기업이 B은행 발행의 당좌 수표(타점권)를 오늘 A은행에 입금시켜 대출 「계수」를 줄이고, 이 수표가 교환에 돌아오는 내일은 C은행 발행의 타점권으로 이를 막고, 다시 모레는 A은행의 타점권으로 C은행의 구좌를 막는 식으로 계속 타점권을 돌리면 실제 은행 대출은 한 푼도 회수가 안되면서 장부상으로만 A은행의 대출 잔액이 줄어들게 된다..
최근 통화 당국이 내부적으로 추정해 본 바에 따르면, 금리 자유화와 함께 통화 관리 방식이 간접 규제로 전환되던 지난해 12월초 약 1조7천억원 수준이던 시중의 타점권 유통액은 금리 자유화 이후 12월말에는 1조1천억원 수준까지 줄어들었으나 올 들어 1∼2월 직접 규제방식의 통화 관리가 강행되자 지난 2월말에는 2조원 이상으로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금리 자유화 이후 3개월간 통화 지표는 큰 기복을 보이고, 이에 따라 통화 정책도 갈팡질팡 했지만, 이의 상당 부분은 실제 돈의 양에는 관계없이 타점권 장난에 놀아난 「숫자놀음」에 불과했다는 이야기다.
지난 2월의 총 통화 증가율이 10%를 약간 넘는 선에서 간신히 잡혔다던가, 단자사가 부도 직전까지 몰리는 고통스런 통화 긴축 속에서도 2월의 부도율이 최저 수준이라던가 하는 일들은 모두 그 같은 타점권 장난으로 풀이된다. <김수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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