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 찾은 「통일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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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공화국 수립 후 특히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고있는 부처를 들라면 국토통일원이라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통일논의가 활성화되면서 통일원이 관심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69년3월1일 통일원이 발족한 후 통일문제에 대해 통일원이 정부 내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얼마만큼의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선 나름대로 「할 얘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국외자들은 물론, 상당수 통일원 관계자들도 인정하고있다시피 통일원이 갖고있는 「고유업무」의 수행정도는 지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7· 4공동성명 등 중요한 정책결정과정에 끼지 못했던 경우가 다반사였고, 통일원 자체도 이를 「당연시」하고 스스로 체념해 왔던 게 사실이다.
여기에는 구조적으로, 혹은 내재적으로 여러 가지 배경이 있을 것이다.
그중 원천적인 요인은 그 동안의 정권들이 통일문제를 「진지하게」다루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여겨진다.
3공이나 5공에서는 통일문제가 정권안보의 수단으로 이용되기 일쑤였다. 대북제의 등은 정국의 중요한 시기에 발표됐고 통일문제는 「정치공작적」차원에서 다뤄져 범인들의 손밖에 있는 성역이 됐었다.
또 한가지 요소는 통일문제가 공작적으로 취급되다보니 자연 그것은 중앙정보부나 안기부의 전유물이 되어버렸다. 힘없는 통일원은 이들 정보기관의 종속물화되고 대행 기관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바람에 80년 정부기구 축소작업 때 그나마 있던 정책기획실이 없어지고 다른 직급도 격하되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통일원 내부에서는 자괴심이 팽배해지고 「사명감」이 분출되는 현상은 찾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예산확보 과정을 들 수 있다.
다른 부처는 예산을 좀더 따내기 위해 기획원 등 관계부처에 로비까지 하는데 통일원은 거꾸로 반발하는 예가 전혀 없이 순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7·7선언이후 정부가 과감하게 대북개방정책을 추진하면서 상황은 바뀌어질 수밖에 없게됐다.
무엇보다도 시대적 분위기가 과거처럼 정보기관이 통일문제를 떡 주무르듯 하고 정권안보수단으로 이용하기 어렵게 됐다.
따라서 발족 20년만에 통일원이 스스로의 일을 되찾게 된 셈이다.
통일원은 이제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의 막중성을 절실히 느껴 자신의 일을 하는 정부기관으로서의 긍지도 되찾아야할 것이다. 안희창(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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