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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경제통합 협상도 서두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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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2000년대 들어 지역경제 통합이 유행처럼 국제적으로 번지고 있으나, 유럽연합(EU)은 거의 유일하게 성공을 거두고 있는 예다. 비록 동북아와 유럽 사이에 여건은 크게 차이가 나지만 EU의 경험은 간접적으로 많은 교훈을 준다.

EU의 이상과 취지는 유럽통합을 통해 지속적인 평화와 안정을 실현하는 한편 경제장벽이 없는 하나의 큰 시장을 이룩하는 데 있다. 만약 유럽 국가들이 그들 사이의 갈등, 민족감정, 이해대립, 과거사 등을 먼저 해결한 후에 통합을 시도하고자 했다면 오늘날의 EU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럽은 먼저 경제통합에 착수했는데, 그 자체가 유럽통합의 첫 단계이며, 동시에 경제적 실익을 가져온다. 이런 의미에서 유럽통합의 추진은 합리적 현실주의, 그리고 미래지향적 실리주의에 바탕을 둔다.

경제통합은 회원국 내 시장경제 체제의 기반 확립을 전제로 한다. 유럽경제협력기구(OEEC, 1948~61, 현 OECD의 전신)의 활동은 경제통합의 착수를 위한 여건을 조성해 주었다. 이 기구는 회원국 간 밀도 높은 경제정책 협조를 추진함으로써 상호 경제운영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유럽 내에서 시장경제가 뿌리를 내리는 데 기여했다.

주권국가 간 경제동맹은 그 성공 선례가 없기 때문에 EU는 유럽 특유의 접근을 개발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복잡한 제도의 도입이다. 그동안 많은 조약이 채택됐으며, 각종 기구와 기관들은 서로 밀접한 연관 아래 유기적으로 각각 맡은 업무를 담당한다. '제도화'야말로 회원국의 통합 의지를 반영하는 한편 EU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버팀목이다. 실효성 있는 제도화는 회원국이 적어도 주권에 대한 최소한의 제약을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

EU의 활동이 모든 회원국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기본적인 배경은 역내 조화로운 발전, 형평, 유대의식 등과 같은 공동체 정신에 있다. 경제통합이 원칙적으로 경쟁 및 효율과 같은 시장원리에 기초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EU는 역내 경제.사회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지속적인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그 밖에도 EU가 실물시장 통합의 완성과 금융통화 통합을 동시에 추진했다는 점은 동북아에도 시사하는 바 크다.

동북아 시장통합의 추진을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경제적 이득이다. 역내 무역 의존도는 1990년대 이후 다른 경제권에 비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상호의존도의 심화와 함께 역내 무역구조는 중간재를 중심으로 각국의 비교우위에 따라 거대한 생산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동북아 FTA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기능적인 시장통합을 제도화함으로써 하나의 안정적인 큰 시장을 형성하는 데 따르는 이득을 극대화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우선주의적, 시장주도적, 실리주의적 접근이 병행돼야 한다.

유럽의 경우와 달리 동북아에서는 경제적 이득을 우선함으로써 민족주의, 안보불안, 역사청산, 민족정서, 패권경쟁을 비롯한 민감한 장애요인들을 극복할 수 있다. 시장통합을 위해서는 안정되고 평화로운 환경의 조성이 필수적인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EU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시장통합은 국가 간 다양한 관심의제를 지속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하나의 테두리를 마련해 준다.

한편 한.중.일 3국이 경쟁적으로 각각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제국과 체결을 서두르는 FTA의 내용을 보면 제도화의 측면을 거의 담지 않고 있다. 이런 유형의 FTA는 '지속가능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동북아 제국은 공동시장을 장기목표로 하는 경제통합의 첫 단계로서 통상적인 FTA와는 다른 시장통합적인 FTA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즉 관세의 철폐뿐 아니라 수많은 비관세조치(NTM)에 관한 정책협력과 조정 또는 접근을 통해 단계별로 실질적인 무역장벽들을 제거해 나가야 한다.

동북아 내 경제협력의 필요성으로 미루어 경제통합을 위해서는 초기부터 FTA를 포함하는 동북아경제협력체(가칭)와 같은 포괄적인 국제기구의 설립이 요구된다. 이 기구 내에서 동북아자유무역지역은 물론 통화금융 협력 및 경제산업 협력(에너지.자원개발 등) 등을 동시에 추진할 수 있다.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최소한의 (상설)기구 및 기관의 설치는 불가피하다. 또 역내 격차 해소를 취지로 하는 동북아개발은행(가칭) 및 각종 구조조정기금 등도 도입돼야 한다.

이 밖에도 이 기구 내에서 본격적인 무역자유화 이전에 일정 준비기간을 가짐으로써 회원국 간 경제정책 협력을 강화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 당연한 순서다. 이 기간 특히 북한.러시아 및 몽골 등은 준회원국의 지위와 함께 국내 시장경제의 정착을 위한 구조조정을 추진할 수 있다.

동북아 경제통합은 장기적으로는 문화공동체의 형성을 비롯해 여러 이점을 갖는다. 예로 동북아지역은 국제협상권의 강화를 배경으로 미국 및 EU와 함께 국제경제질서의 발전을 주도하는 세계 3대 성장축으로 등장하게 된다.

동북아 경제통합을 위해서는 우선 추진주체가 필요하다. 한국은 중국.일본 간 불화나 패권경쟁 등과 같이 역내 복잡하게 얽힌 역학구도를 풀어나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국가라고 생각한다. 유럽통합 과정에서 벨기에의 기여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국의 중재자.조정자 역할이 기대된다.

올 들어 한.미 FTA 협상이 새롭게 부각했고 일부에서는 동북아 FTA 추진을 늦추자는 주장이 나온다.

이에 대한 해답은 '순서'가 아니라 상대국에 따라 어떤 형태의 적절한 FTA를 모색하느냐는 '질(質)의 선택'에 달렸다. FTA의 가장 큰 이점은 당사국들이 합의하는 내용만을 담는 유연성에 있다. 마치 식당에서 메뉴를 고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동안 수많은 FTA가 체결됐지만 동일한 내용의 FTA는 하나도 없다. 원칙적으로 동북아 FTA와 '낮은 단계'의 한.미 FTA를 동시에 추진하는 데 하등의 지장이 없다.

미국의 FTA 정책은 상대국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한다. 미주 이외의 개별 국가들과의 FTA는 다분히'WTO 플러스'적인 성격을 띤다. 즉 미국은 WTO 내 다자협상을 통해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시장개방 현안을 개별국가별로 접근하기 위한 보완수단으로 FTA를 활용하고 있다. 한.미 FTA 협상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되는 주제들도 이러한 입장을 반영하며 한국도 여기에 맞추어 대안을 준비해야 한다.

김세원 서울대 명예교수 SNU-KIEP EU Center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