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보다 인기 높은 양담배|김수길(경제부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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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모스크바의 전시 센터에서는 요즘 소비재 박람회가 열리고 있다. 이름하여 「콘섬 엑스포 89」 다.
체코슬로바키아· 영국· 터키등 세계 l7개국의 2백80개 업체가 저마다의 제품을 가지고 참가하고 있는 이 박람회는 소련이 지난 79년에 처음 개최했다가 단 두번도 채우지 못하고 중단한 뒤 10년만에 다시 열고 있는 행사다.
소련 국제박람회 국장 「유훌코프」씨가 참가국 관계자들에게 설명한 바에 따르면 이처럼 10년 만에 다시 소비재 박람회를 여는 것은 소련 정부가 이제 개혁· 개방정책에 따라 일반 국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간 군사나 정치를 우선시켜 국민생활을 상대적으로 경시하다 보니 쓸만한 소비재가 없더라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소련 사회에서처럼 립스틱· 팬티 스타킹· 양말· 담배와 같은 물건들이 위력을 발휘하는 나라도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붉은곽의 말보로담배는 마치 「강세 통화」 처렴 통용되고 있어 호텔의 포터나 택시 운전기사들은 소련 돈인 루블보다 말보로를 팁으로 받으려 하고, 이 때문에 소련을 많이 다녀 본 외국 여행객들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상용」 으로 말보로를 대여섯갑씩 갖고 다닌다.
실제로 소비재 박람회에 취재를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가 팁으로 줄 말보로를 가지고 있지 않다하여 승차거부를 한번 당하고 나서는 말보로가 비상용이 아니라 「필수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같은 상황에서 10년만에 열린 소비재 박람회에 모스크바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수많은 모스크바 시민들의 발길은 소련 정부가 낙후된 경제의 실상을 솔직하고 의연하게 시인하는 것에서 부터 개혁정책을 추진하고 있음을 뜻한다.
또 수많은 참가 업체중 특히 삼성· 효성· 삼익악기등 한국의 3개 업체 전시장에 비록 성사여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구매나 합작을 타진하는 소련인들이 가장 많이 찾아오고 있는것은 소련의 개방정책 추진에 한국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개방과 개혁은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로 하루 아침에 될 일이 결코 아니다. 당장 박람회 취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택시 운전기사는 아예 돈 대신 말보로 두갑을 요금으로 받았다. <모스크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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