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테러를 돕다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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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우리 경찰이 불철주야 봉사와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못받아 온 것은 경찰이 걸어온 어두운 전력 때문이었다. 한창 꽃다운 나이에 애석한 죽음을 당한 박종철군 사건이 상징해주듯이 경찰이 「권력의 시녀」로 전락, 막상 그들이 봉사해야할 국민을 무참하게 짓밟고 정치의 도구로 이용되어온 게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적대시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러한 경찰이 6·29선언후 새로 태어남을 몇 번이고 다짐하면서 새로운 결의와 각오로 민주 경찰상 정립에 그런 대로 노력해온 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동안 경찰대학 출신 경찰간부들의 용기있는 중립선언도 있었고 결의대회도 눈여겨 보아왔다. 경찰은 이제 그러한 몸부림를 뼈를 깎는 노력으로 국민과 가까워지고, 믿음직하고 사랑받는 경찰로 변신해야 할 당위성과 무거운 책무가 주어져 있다. 그것이 민주화라는 시대정신에도 부합하고 경찰에 부하된 1차적 사명이다.
그러한 경찰이 요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현대그룹 노조원집단테러사건에 깊이 간여해 테러를 은폐, 방조했다는 보도는 우리 모두를 경악케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경찰이 권력의 하수인으로서의 역할에서 이제는 조직적 테러의 한편이 되기에 이르렀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오래 전에 경찰이 포주나 소매치기일당으로부터 돈을 받고 인신매매와 소매치기 범죄를 눈감아준 일은 있었으나 대기업 측의 반사회적 폭력을 도왔다는 건 외국의 오락 영화에서나 볼수 있는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온 국민이 무질서와 집단폭력을 저주하고 공권력의 응징을 바라고 있는 터에 경찰이 아무리 타락했기로서니 스스로가 테러에 연루될 수 있는가.
국민에 대한 배신이 아닐 수 없고 정부의 신뢰를 송두리째 떨어뜨린 공권력의 탈선행위다.
문제의 울산경찰서는 현대 테러 사건후 사건을 축소, 왜곡하고 있다는 비난을 들어왔다. 현대건설 고위간부가 사건발생을 전후해 테러 가담자들과 접촉한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조사는 커녕 앞장서 부인했고 구속된 현대엔진전무 한씨도 처음엔 싸고돌다가 여론이 들끓자 검찰의 범죄사실 보완 지시를 두번씩이나 받았다.
또한 관심의 초점이 되고있는 그룹고위층 관련수사나 외부조직폭력배동원 여부 등은 아예 수사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는 지적도 받아왔다.
경찰과 결탁해 폭력단을 동원한 현대의 부도덕하고 반사회적인 처사는 백번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그에 놀아난 경찰의 방조행위는 준엄하게 응징돼야 한다. 여기에는 지위의 고하가 있을 수 없고 여하한 명분이나 정상도 참작될 수 없다.
테러방조를 지휘했거나 묵인한 경찰의 최고책임자가 누구며 그동안 없어졌다던 관계기관대책회의는 무슨 역할을 했고, 현대 측과는 어떤 흥정이 이루어졌는지 진상이 있는 대로 규명되어야 한다.
경찰의 테러방조사건은 어느 의미로든 테러사건 자체보다 중대하고 사태의 추이와 처리결과에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사건에 연루된 당사자들의 형사처벌은 말할 것도 없고 전국 경찰을 지휘, 감독하는 고위관계자들에 대한 엄중 문책도 당연히 뒤따라야 할 것이다. 정부의 이 사건 처리를 주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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