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독선의 정치'와 테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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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번 사건은, 물론 테러와 비견할 정도는 아니지만,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우려할 만한 사회적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예컨대 황우석 교수 사건에서 나타난 일부 지지자의 황 교수에 대한 맹목적 믿음과 추종에서 볼 수 있듯이 문제 해결 과정에서 과학도, 이성도, 합리적 토론도 중요하지 않았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을 둘러싼 대립에서도 설득.양보와 타협은 오간 데 없고 극단적 형태의 물리적 충돌과 대결만이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최근 나타나는 사회적 갈등에서는 양쪽 모두 자기의 주장만이 옳고 상대방의 견해는 무조건 잘못된 것으로 여기는 독선적 인식이 팽배해 있다. 갈등의 당사자가 그 사건을 '선과 악'의 싸움으로 간주하게 된다면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 이외에 그 갈등을 해결할 방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쉽게 굴복하려 하지 않는다면 내가 믿는 '선'을 위해 폭력과 같은 일탈적 행위도 서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우려할 만한 풍조가 생겨났을까? 서구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일탈행위는 기존 정치권에서 수용하지 못하는 뿌리 깊은 정치적 소외감이 형성돼 있거나, 합의와 타협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정파 간 다툼의 결과로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서구 일부 국가에서 나타나는 소수 인종이나 이민자들에 의한 테러나 폭동은 전자의 사례고, 오늘날 팔레스타인이나 이라크, 과거 북아일랜드에서 나타난 테러행위는 후자의 경우다. 두 가지 모두 정치체제가 그 내부의 정치적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고 조정해 내지 못함으로써 생겨난 결과다. 결국 정치권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폭력이나 테러와 같은 정치적 일탈행위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테러사건을 포함해 최근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우려할 만한 징후 역시 정치권에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것 같다. 정당이 사회적으로 행하는 주요 역할은 사회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견해를 대표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함으로써 사회적 통합에 기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의 정당이 이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난 몇 년간 우리 정당 정치는 관용.통합.조정보다 배제.독선.증오를 생산해 왔다. 제도권 내 '동업자'라 할 수 있는 정치인끼리도 기본적 신뢰감이나 상호 존중의 마음을 보이지 못했고 심지어 서로의 정당성조차 부정하려는 모습도 보였다. 이처럼 배척과 증오가 정치권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면서 주요 이슈마다 사회가 갈라서고 서로가 서로에게 손가락질하는 세상이 돼 버렸다. 자기들과 다른 견해는 용납하지 않고 욕설과 인신공격으로 몰아세워 내쫓아 버리는 독선의 정치는 인터넷 공간상에서는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정당들은 사회적 갈등 해결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인터넷이나 일부 당 지지자의 편향되고 과격한 의견에 부화뇌동하면서 사회적 갈등을 걸러 내기보다 이를 더욱 심화시킨 경향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건은 독선과 증오의 정치 문화라는 최근 우리 사회의 병환이 터져 나온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이런 야만적 행위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관용과 공존, 대화와 설득의 정치문화가 독선과 증오의 정치를 대신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결국 정치권의 깊은 자성과 책임의식이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다. 박 대표의 빠른 쾌유를 기원한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 정치외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