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세계와 정치적 이데올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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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금세기 한국의 미술을 세계적으로 떨친 고암 이응로 화백은 갔다. 감상적으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조국통일을 보지 못한 채 그가 유명을 달리한 것을 아쉬워 할 수도 있다. 상투적으로 그의 예술적 업적을 기리고,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호기심으로 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그를 기려야할 까닭은 그가 후세에 길이 남을 민족의 자랑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과학정책에 대한 강의와 프랑스의 과학시스템을 연구하기 위한 얼마간의 체불기간 중 이응로 화백을 만난 것은 행운이요 자랑이었다. 창조적 과학자와 창조적 예술가의 비교연구 관점에서 볼 때 그는 하나의 전형이었다. 한국전통서화의 정신적 맥으로 거의 모든 장르의 미술창작을 통해 일생에 거쳐 여섯 차례의 창조적 변화를 거쳐온 그는 진실로 예술가의 귀감이다.
그가 상여에 칠을 하며 끼니를 잇고, 간판 일로 사업적 성공을 하면서도 끝까지 예술적 집념을 버리지 않고 성취시킨 것은 젊은 예술학도들이 본받을 만한 희망이다. 평생을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10시까지 부지런히 작업을 한결같이 지속해온 것은 그가 세계적 위치에 오르게된 귀중한 밑받침이었다. 평생을 야인으로 지내면서도 대쪽같은 순수성을 지녔기에 그는 속기가 없는 선비의 표본이었다.
그러나 민족적 자랑으로서 그를 기리면서도 생전의 그의 한을 풀어주지 못한 것은 우리의 수치다. 오늘에 와서는 화석같이 느껴지는 22년전의 동백림 사건으로 인한 옥고와 12년전 이른바 윤정희·백건우 부부 납치 미수사건의 연루혐의로 말미암아 그의 예술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이 되었다.
대조적으로 몇 년 전 대만에서 서거한 장대천 화백의 얘기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이데올로기로 갈라진 중국의 두 정치적 거물인 장개석과 모택동은 장대천 화백을 서로 모셔가려고 했고, 결국 장개석의 초치로 대만으로 간 그는 국가원수보다 더 후한 대접을 받으며 창작활동에 전념하여 세계적 화가가 되었다. 「프랑코」독재에 항거하며 그의 게르니카 만행을 불후의 명작인 『게르니카』로 남긴「피카소」는 만년의 「프랑코」가 귀국을 백방으로 종용했지만 끝내 거부했다. 민주화 스페인은 그의 작품 『게르니카』를 외교적 교섭을 통해 미국에서 들여와 프라도미술관 별관에 국보로 모셔놓고 있어 마드리드와 스페인의 자랑이 되고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지만 사실 이데올로기는 일시적이고 예술은 영원하다고 해야할 것이다. 더욱이 고암은 이북에 있는 아들을 만나게 해준다는 말에 베를린까지 갔다가 아들은 만나지도 못한 채 「빨갱이」로 몰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술인일 뿐이다. 순수한 예술인은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공산주의자가 되었던 박영희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라고 한탄했던 것이다.
시대가 가면 이데올로기는 퇴색하고 사라지며 진정한 예술만이 영원히 살아 남는다. 무적함대로 세계를 누비던 스페인의 영광을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지만 「그레코」「벨라스케스」「고야」「피카소」「미로」「달리」로 이어지는 스페인인의 예술은 세계의 예술이 되었다. 바르셀로나는 1992년 올림픽보다 「미로」의 기념미술관을 더 자랑하고 「달리」의 활동을 더 주목한다.
경제발전을 통해 양적 측면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우리 나라는 과학발전에 위해 질적인 선진국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문화를 통한 선진국이 되는 일이다.
일본이 경제대국이면서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문화천국으로 대접받는 것이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니다.
이제 고암은 갔다. 그러나 그의 예술적 업적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고 그의 작품은 후세에 길이 전해져야 할 것이다. 그만 못한 화가를 세계적으로 만들어 민족적 긍지로 삼으려는 문화적 후진국의 노력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그러한 국가적 노력 없이도 세계에 우뚝 서 있다. 오히려 그는 남북 분단 이데올로기의 피해자였으면서도 더욱더 작품에만 몰두해 우리의 자랑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법적으로 프랑스 국민이 되었다. 그의 혼은 한국인이요, 그의 작품은 동양의 맥, 한국의 얼에서 나온 것이지만 우리 손에서 멀리 떨어져있다. 우리는 후세에 그의 예술을 오래 기리기 위해 기념관을 지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에 대한 자그마한 보상이 될 것이다. 고암 이응로 화백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암 돌아가야지. 그리고는 젊은이들에게 남김없이 내혼, 내가 가진 것을 넘겨주어야지.』이제 그는 유명을 달리했고 혼백은 고향에 와 떠돌 것이다. 그의 혼이 담긴 작품을 위한 기념관 건립을 통해 그의 작품을 후세에 길이 전하는 것이 문화국으로서의 소중한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이진주<한국과학기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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