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 화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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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넓고 넓게 펼쳐진 광장 위에 수많은 인간군상들이 뛰놀고 있다. 혹은 달리고, 혹은 춤을 추는 모습이 마치 축제같기도 하고 절규같기도 하다. 이들은 저마다 몸짓은 다르지만 일정한 리듬을 따라 광장을 가득히 메우며 무리를 지어 흐르고 있다. 어디로 들 가는 것일까.
신정 벽두인 지난 1일 호암 갤러리에서 테이프를 끊은 재불 원로화가 고암 이응노전. 그 전시회에서 유난히 관람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작품이 이 『인간시대』의 연작들이다. 기호로 환원된 이 군상들의 모습은 바로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지난 58년 도불한 이래 동베를린사건,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사건에 휘말려 국내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고암은 그동안 불편했던 모든 오해가 풀리고 30년 만에 금의유향하는 이번 자신의 작품전을 보기 위해 귀국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한국의 민족적인 추상화를 개척하려 노력했다. 그래서 동양화의 선, 한자나 한글의 선, 그리고 삶과 움직임에서 출발하여 공간구성과 조화로 나의 화풍을 발전시켰다』고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파리에서 고암이 이룩한 예술은 동양의 예술정신과 서양의 물질문명을 조화시켜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활화산의 용암처럼 분출하는 그의 창작의욕은 가위 초인적이다. 그는 동베를린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면서도 작품에 대한 의욕을 잠재우지 못했다. 고암은 종이가 다 떨어져 나간 부채살에 먹다 남은 밥알을 이겨 붙여 위체작품을 만든 일이 있다.
그같은 창작에 대한 욕심은 화필을 잡기 전에도 그랬던 모양이다. 『나는 17세때까지 고향 (충남례산)의 자연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나를 도와주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려 했다. 나는 그래도 고독을 알지 못했다. 나는 혼자 몰래 가벼운 마음으로 항상 그림을 그렸다. 땅위에, 벽에, 눈위에, 그리고 검게 탄 나의 피부에…』
누구보다도 조국의 통일을 염원했던 고암. 그가 비록 자신의 작품전을 보지 못하고 먼 이국 땅에서 눈을 감았지만 그의 풋풋한 예술정신과 조국에 대한 끝없는 열정은 영원히 작품 속에 살아 남을 것이다 (고암 작품전은 2월26일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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