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 앞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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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만남도 허물어짐도 인연의 힘인 것을
궁그려 헤아려 보면 역사를 떠메 온 아픔
짓눌린 톱니바퀴 소리 영원도 순간에 있다.
세월을 여닫고 선 채 화관쓴 무동이어라
단청에서 묻어나는 빛, 한인가 잠언인가
한바탕 들쑤신 속이 산악보다 의연하다.
자족의 꿈일망정 소중히 다져둔 이 뜰
시각을 모를라치면 달빛이나 쬐일 것을
열지어 돋아나는 경이, 미소인 듯 묵시인 듯…
아무 때 찾아가도 흔들리는 문명의 손
높게 쌓아 올릴수록 회억 더욱 적막하고
돌에도 목숨이 있는가 되감기는 인고의 끈.
수줍어 애태워서야 가마득 먼 약속일 뿐
사무친 기원이 허망으로 돌아누우면
스스로 계를 깨뜨리며 서성대는 긴 여정.
폐허건 환희의 불씨건 칠보 빛 흔적이여
밤새 퍼담아도 마르지 않는 비의의 떼
이끼를 털어 낸 자리에 금싸락을 묻어본다.

<서울 장충동 산5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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