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식-갈등의 벽을 허물자|남북한 서로 「장점」을 봐야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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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연전에 독일정부 초청의 연구여행을 위해 얼마동안 서베를린에 체류하면서 무척 부럽게 생각했던 점은 동·서독간의 갖가지 교류와 해빙분위기였다. 최근 공산권 내부의 개혁과 개방 물결을 타고 중국과 대만사이도 차츰 풀리는 듯한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 한반도에는 언제나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지루함을 깨고 눈 녹듯 풀어지는 화해와 자유로운 만남의 봄을 기대할 수 있을지 아쉬운 마음이다.
한 해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 비단 양독의 이산가족들만은 아닌 줄 안다.
적어도 남한에서는 일련의 탈 경직성의 흐름에 맞추어 적극적인 북방정책의 추진과 함께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해 여러 모의 노력과 정책을 강구하고 있다. 이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 반드시 전폭적인 환영으로 나타나지는 않으나 어느 정도 희망적인 조짐이 조금은 보이는 것도 사실이 아닌가 한다.
남북한 관계는 마치 가족간의 애증관계와 같아서 곁으로는 매우 심각하고 극단적인 갈등으로 얼룩져 있으면서도 마음속 깊이에는 어쩔 수 없는 끈끈한 정과 어려웠던 역사를 함께 걸어왔던 뿌리깊은 전통의 공유로 미묘하게 묶여있는 하나의 공동체적 관계라 할 것이다.
개인들 사이의 인간 관계에서나, 집단간의 사회적 관계에서나, 밀접한 정의적 (Gemeins-chaft)인 성격이 강할수록 한번 갈등이 생기면 그것은 강렬하고 극단적인 양상을 띠기 쉽고 그 상처는 깊고 오래갈 수 있다. 반면에 그러한 공동체적 바탕이 있음으로 해서 화해의 계기만 찾게되면 다시 화합하여 친근한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오히려 수월할 수도 있다..
남북한 관계의 갈등해소도 이러한 전망에서 접근하여 이해하고 문제해결에 임할 수 있다. 우선 남북분단이 우리민족 자체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강대국들의 주관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우리민족에게는 민족적 자부심의 손상일 뿐 아니라 깊은 한의 응어리를 안겨 주었다. 더구나 초기 분단을 극복하는 일에 우리 민족의 정치인들이 합심 협력하지 못했다는 점은 그 응어리를 더욱 아프게 해준다. 거기에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겪었으므로 그 한스러움은 극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아픔은 우리민족으로 하여금, 특히 당시의 극적인 증오 관계를 유발한 현장을 체험하지 않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더욱 분단 극복에의 염원을 강렬하게 품도록 해 주는 요인이 된다. 이 적은 시간이 흐를수록 전쟁과 그에 이은 냉전기류의 지속으로 인한 적대감이나 상호공포심까지도 생각보다는 쉽게 씻어 버리도록 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지난 40여년에 걸친 남북한 이질화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물리적·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진다 해도 문화적 격차를 극복하는 문제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이에 대해서도 좀더 깊은 성찰과 정확한 분석이 요구된다. 그것은 이질화 자체의 실상과 성격 및 그 요인에 대한 분석적인 이해를 전제로 하며 동시에 그러한 이질화의 이면에 도사린 민족공동체로서의 동질성의 존속과 사회변동의 결과로 생성되는 동질화의 성격에 대한 통찰도 필요하다.
우선 남북간에는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요소들이 전개돼 왔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남북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군대가 각각 심어준 정치문화와 이데올로기, 정치·경제체제의 차이에서 비롯하였다. 게다가 국제적 문화접변의 성격으로 보아도 한쪽은 개방적 문화이입으로 다양한 외래 문화가 유입되었고, 서양의 대중문학가 풍미해왔는데 비해, 다른 한쪽은 폐쇄적·선별적으로 문화접변을 철저히 통제·조절하여 왔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남북한의 문화는 언어를 비롯하여 학문·예술·대중문화·일상생활 양식·사고방식 같은 여러 부문의 이질적 변동을 겪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문화의 동질성을 자아내거나 유지하는 변화도 보인다. 첫째, 남북한이 추진방법과 속도에서는 큰 차이를 보여왔지만, 지난 20여년에 걸쳐 광범위한 공업화를 이룩하였다.
공업화는 그 사회의 전통적 요소와 이념·체제의 차이를 넘어 사회 문화적 양식에서 일정한 차원의 동질화를 초래하게되어 있다. 물론 동질화가 일어나는 영역이나 정도는 사회마다,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공업화에 의한 사회·문화적 수렴은 보편적이다.
둘째, 위에서 살펴본 남북한의 이질화를 인정한다 해도, 전통적 요소의 존속·활용 혹은 재생이 놀라울 정도로 남북한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다. 몇 가지 보기만 들면, 사회조직원리로서 우리문화에 두드러진 권위주의, 연고주의, 정실주의, 집합주의 같은 성향이 있다. 이런 요소들은 자칫 부정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중에는 사회의 합리화과정에서 유용하게 작용할 수 있는 요소도 있다.
특히 가족주의는 남한에서 공업화와 도시화를 겪는 동안 조금은 약화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북한은 오히려 가족주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우리의 오랜 전통 중에 두드러진 인정주의 같은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나 인간관계에서 아직도 강하게 작용하는 것은 남북이 여전하다. 갖가지 인성, 행위유형의 특징들에서도 한민족은 그 전통적 요소를 버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역시 공통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종교적 뿌리와 역사적 경험에서 생성된 민족기질로서 강한 성취지향, 높은 적응력, 끈질긴 지구력, 뛰어난 창의력 같은 요소들은 앞으로의 민족공동체 재구성의원동력으로 작용할 자원이라 하겠다.
또한 우리민족의 지적 유산은 다가올 세기의 문화중심으로 부상되고 있는 아시아의 새로운 정신적 지도력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더구나 그간의 광범위한 이질화 추세에도 불구하고 통합가능성에 희망을 갖게 하는 핵심적 요소는 이미 앞에서 지적한대로 민족공동체로서의 동일감을 우리가 한번도 버린 적이 없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독일에서 보면 그처럼 경제·문화적인 교류와 인적 왕래를 개방하면서도,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반드시 동서통일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태도가 상당히 있다.
그에 비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젊은 세대일수록 거의 맹목적이라고 할만큼 강렬하게 통일에 대한 염원을 표현하고 있음은 그 연유가 바로 민족공동체적인 동일감에 있다 할 것이다.
비록 북한의 참여 없이 이루어지긴 했어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는 민족적 역량을 세계에 과시할 만큼 우리의 역량도 커지고 국제적 지위도 향상된 오늘, 그와 같은「민족공동체적 자아」의 회복이야말로 남북이 마땅히 함께 풀어야 할 과제인 것이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서로에 대한 철저한 재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 일이 중요하다. 과거의 쓰라린 경험으로 형성되고 보강되어 온 불신과 증오, 적대감 같은 것을 과감히 벗어 던질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남북한은 상호간에 서로의 신발을 신고 서로의 눈으로 상대를 이해하려는 일종의 현상학적인 접근이 필요하고 상호간의 단점은 버리되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려 변증법적 지양으로 나아가야 하겠다.
물론 분단극복은 일방의 의지와 염원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호적인 개방과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므로 남북간 갈등해소와 궁극적인 재통합을 위해서는 우리의 북한에 대한 인식조정과 맞추어 북한이 하루속히 스스로 변신과 개방을 추진하여 남북이 대화로서 엉클어진 매듭을 풀어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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