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성 이상의 진전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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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올해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변화가 예상되는 분야는 남북관계와 북방외교다. 이 영역의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앞으로 더 많은 대북 방 경협이 이루어지고 여러 갈래의 대화도 열릴 전망이다.
새해엔 이미 시작된 국회회담이 계속되는 가운데 총리 급 정치 군사회담, 체육회담, 학생 단체 접촉, 3자 회담 예비접촉 등이 새로 열리고 적십자회담과 경제회담도 이변이 없는 한 재개될 것이다.
김일성은 신년사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포함한 남북 정치·종교지도자를 초청, 남북 연석회의를 갖자고 제의했다. 성실성을 의심케 하는 전제가 붙긴 했지만 남북관계의 변화를 예고하는 또 하나의 직후임엔 틀림없다.
남북관계의 활성화는 필연적인 현상일지 모른다. 벌써 하나의 대세로 굳어져 가는 느낌이다. 그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시대적 배경과 필연성을 깔고 있다.
첫째는 주변정세의 변화다. 중국의 실용주의 개방노선은 이미 정착단계에 들어섰다. 글라스 노스트(개방) 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노보에 뮈시레이니에(신사고)를 내걸고 「충성 없는 혁명」을 추진하고 있는 소련은 정책의 중점을 동아시아로 돌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한국의 북방정책과 북한의 대화공세가 겹쳐 있다. 서울과 모스크바 사이엔 정상의 친서가 교환됐다. 연내에 중소의 무역사무소가 서울에 설치될 전망이다. 남북관계의 변화는 금년 상반기로 예상되는 「고르바초프」의 평양방문을 계기로 한층 촉진될 것으로 보인다.
둘째의 남북관계 활성화 배경은 현실적인 필요성이다. 지금 북한은 심각한 경제적 난국과 권력승계의 과제를 안고 있다. 남북간에 경제교류가 이뤄지면 북한의 경제사정은 크게 개선될 수 있다. 남북관계의 발전은 북한의 내부사정으로도 필요하다.
중간평가를 앞둔 노태우 정부로서도 남북관계의 활성화는 바람직한 여건이 된다.
세 째는 민족적 당위성이다.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은 남북한 모든 동포의 염원이다. 통일은 7천만 겨레의 숙원이다. 더구나 지금은 세계 여러 곳에서 주변국가들이 하나의 경제 공동체로 결합돼 나가고 있다.
구주공동체(EC)의 12개 회원국은 92년까지의 단일 시장화를 목표로 국가간의 경제적 장벽들을 제거해나가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멕시코 사이에도 관세 철폐를 내용으로 하는 자유 무역협정 체결이 추진되고 있다. 중국·홍콩·대만은 「대중화 경제권」건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세계가 이렇게 움직이는 판에 우리가 못할 이유는 없다. 남북관계 발전이 통일의 필수 전제라는 점에서 그 당위성은 더욱 명백해진다.
올해는 공식적인 남북대화와는 별도로 실질적인 남북교류가 늘어날 전망이다. 기업인들의 북한방문은 남북관계 발전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이다.
「7·7대통령 특별선언」으로 북한에 대한 경제적 문호개방이 이뤄진 이후 이미 우리는 북한 제품을 접하고 있다. 이것은 엄청난 변화이며 남북한 접근방식의 중요한 발전이다.
분단국의 접근과 교류엔 2개의 방식이 존재해왔다. 독일모델과 중국모델이 그것이다.
독일모델은 선 대화·후 교류의 방식이다. 이것은 정부주도의 공식 교류 형태다. 동·서독정부는 72년 12월 「동·서독기본조약」을 체결한 이후 교류와 협력을 증진시켜왔다. 그 결과 올림픽 단일 팀 출전과 유엔 동시가입, 정상회담의 교환개최도 이뤄졌다.
중국모델은 정부차원의 공식관계 없이 교류가 이뤄지는 방식이다. 이것은 민간선도의 비공식 교류형태다. 북경과 대북 사이엔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북경의 일국 양체제론과 대북의 3불 정책(불 접촉·불 타협·불 담판)은 공식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대륙과의 경제교류와 관광·친척방문이 방해 없이 이뤄지고 있다.
남북한 사이엔 공식대화는 여러 차례 시도돼 왔으나 상호교류는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독일모델 실험이 실패했음을 뜻한다. 북한상품의 수입과 기업인의 북한 방문 계획 은 중국모델의 새로운 실험으로 볼 수 있다.
남북관계의 변화는 아직 초기단계다. 따라서 상징성과 피상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양적 변화의 확대는 질적 변화를 가져온다. 표면적인 현상변화의 지속은 실질적인 구조변화를 가져온다. 따라서 지금의 작은 변화라도 계속 확대시켜 나가면 남북관계의 질적 발전과 구조적 개선을 가져올 수 있다.
지금은 외부정세나 내부여건으로 보아 남북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중소가 협력하고 미일이 후원할 태세로 있다. 지금 단계에서 통일은 요원할지 모른다. 그러나 남북이 성실히 노력한다면 상호 교류와 협력의 길은 틀 수가 있다. 이런 기회는 과거에도 없었고 다시 오기도 쉽지 않다. 국제관계는 극히 가변적이다. 따라서 지금의 상태가 언제 변할지도 모른다.
분단문제는 아무리 기회가 좋고 접근방식이 변했다 해도 양측의 적극적인 의지와 성실한 노력이 따르지 않으면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남북문제는 더 이상 체제 선전이나 정권 연장의 목적에 희생될 수도 없다. 이 문제는 오직 7천만 겨레의. 이익과 민족공동체 발전의 차원에서 진지하고 엄숙하게 다뤄져야 한다. 이번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의 통일 노력이 결실되어 연내에 대화가 재개되고 교류가 이뤄진다면 슬픔 속에서 암울하게 맞이했던 80년대를 기쁨과 밝음 속에서 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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