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의 불문율 '독대 금지'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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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얼굴)의 '독대(獨對.일대일 면담) 금지 원칙'이 논란이 되고 있다. 이 원칙을 고수하는 노 대통령의 리더십과 소통방식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으냐는 의견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2년3개월간 장관을 지낸 이희범(현 무역협회장) 전 산자부 장관의 17일 발언이 발단이 됐다.

이 전 장관은 "장관 입장에선 남들이 모르는 얘기를 대통령과 하고 싶지만 그럴 기회가 없어 최고통치자와 생각이 달라도 설득할 수 없게 된다"(17일 서울대 행정대학원 특강)고 말했다. 대통령과 각료의 소통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그간 권력 관리에 몇 가지 원칙을 고수해 왔다. 그중에서도 불문율이 바로 '독대 금지' 원칙이다. 밀실 정치를 없애고, 정책 결정 과정의 투명성.합리성을 높이겠다는 차원이다.

과거 정권에서 독대는 대통령의 강력한 권력 관리 수단이었다. 독대를 통해 은밀한 정보를 얻었고, 사람을 견제.관리했다. 대통령과의 거리, 즉 독대의 가능성과 횟수는 곧 권력 서열로 이어졌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차남인 현철씨는 YS 집권 기간 동안 1주일에 한두 번씩 YS와 독대했고, YS는 현철씨의 정보에 신뢰를 보냈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얘기다. 김현철씨의 독대엔 배석자가 한 명도 없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이런 독대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 재임 중 국정원.기무사.경찰의 정보 보고를 받을 땐 국방부 장관이나 비서실장.외교안보수석을 반드시 배석시켰다. 그러나 DJ 시절에도 최측근 인사와의 일대일 독대는 수시로 이뤄졌다는 게 정설이다.

반면 노 대통령의 독대 금지 원칙은 사안과 인물에 관계없이 적용되고 있다. 정치적 운명을 같이해 온 최측근 참모들조차 별도로 만나는 일은 드물다. 2003년 7월 노 대통령은 최측근인 안희정씨를 관저로 불렀다. 17대 총선 불출마를 권유하면서 "나와 함께 일하고 나와 함께 끝을 내면 좋겠다"며 안씨의 손을 잡았다고 한다. 사안의 성격으로 볼 때 두 사람만 만나야 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 자리엔 당시 이호철(현 국정상황실장) 민정비서관과 이광재(현 열린우리당 의원) 국정상황실장이 동석했다.

여당이나 정부 인사들에게도 독대 금지 원칙은 예외가 없다. 여당의 정동영 의장과 김근태 최고위원 역시 1년6개월의 장관 재임 중 단 한번의 독대도 없었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굳이 독대라고 친다면 회의 중간 티타임 때 옆에서 나누는 대화 몇 마디다. 두 사람 모두 퇴임 인사를 하면서 저녁을 함께했을 뿐이다.

이해찬 전 총리 교체 문제를 놓고 청와대와 여당 지도부가 긴박하게 돌아갔을 때다. 정동영 의장은 청와대를 다녀와 "대통령과의 독대에서 총리 교체를 건의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자리엔 이병완 비서실장이 내내 함께했다.

실세 책임총리였던 이해찬 전 총리 역시 대통령과 단둘이 만난 적은 드물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비서실장이건, 수석비서관이건 청와대 참모가 한 명쯤은 배석했다.

그러나 이런 독대 금지 원칙이 언로(言路)의 한계로 연결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많다. 열린우리당 고위 관계자는 "의장이든 원내대표든 당 지도부가 3년여 동안 단 한번도 대통령과 독대하지 못했다는 것은 과거 정권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그동안 터진 몇몇 당정 파열음도 대통령과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탓도 있다"고 말했다.

독대가 없어질 경우 오히려 '권력 내부의 독주'에 대한 상호 견제가 실종될 우려가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여당 내에서는 "일부 외교.안보 관련 실세들이 부처 인사에 영향을 미치며 자기 인맥을 형성하고 있으나 전혀 견제가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청와대 양정철 홍보기획비서관은 이에 대해 "권위주의 시대 의사결정 방식이던 독대의 금지는 시대의 요구였다"며 "중요한 정책의 결정은 독대보다 함께 협의하는 과정을 통해 이뤄지는 게 맞으며 장관이 대통령과 일대일 독대는 못하지만 수시로 대통령을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희범 전 장관은 자신의 언급이 배석자가 전혀 없는 대통령과 각료, 청와대 수석 간의 은밀한 일대일 독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는 "배석자가 있더라도 대통령과 각료 간에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눌 기회가 많아질수록 바람직스럽다는 뜻이었다"고 말했다.

이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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