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있는이야기마을] 한 맺힌 사이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11면

도착한 숲 속은 먼저 와 기다리는 행상 아주머니들이 우리들을 맞아 주었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되었고 반찬그릇 자리가 빈 도시락을 친구들 앞에 꺼내 놓으려니 창피한 생각이 들어 얼른 풀지 못했다. 집안이 부유했던 석남이는 하얀 쌀밥에 계란말이 반찬에다 사이다까지 내놓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석남이를 에워쌌고 석남이는 친한 아이들한테만 사이다를 한 모금씩 먹어보게 했다. 물론 가깝지도 않은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먹고 싶은 마음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어머니가 주신 돈으로 사이다를 사러 갔지만 그 돈으로는 사이다 한 병을 살 수가 없었고 애꿎은 사이다병에 눈맞춤만 하다 돌아서야 했다.

반찬도 없는 밥을 수양버들 그늘 밑에서 혼자서 먹으면서도 동생이 반찬을 제대로 가져갔을까 몹시도 궁금했다. 사이다 때문에 보물찾기도 장기자랑도 별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 노을 지는 하늘에 사이다 병을 수없이 그려 대며 이담에 커서 사이다를 원없이 먹어보리라 다짐을 했다. 말 못하는 세월은 몇십 년을 통째로 삼켰는지 내 아이들 소풍까지 끝을 냈는데, 지금도 파르스름한 사이다 병만 보면 어릴 적 소풍날이 떠올라 열두 살 소녀가 되곤 한다.

강병숙(주부·56·서울 남가좌2동)

26일자 소재는
'부부싸움' 입니다

분량은 1400자 안팎. 성명.직업.나이.주소.전화번호를 적어 23일까지로 보내 주십시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원고료를 드리며, 매달 장원을 선정해 LG 싸이언 휴대전화기도 드립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