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행안부 또 "없애버리겠다" 민간구호단체 대놓고 협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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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안전부가 민간단체인 전국재해구호협회 운영에 개입하려 나서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이 과정에서 행안부 재난관리 담당 공무원들이 협회 직원들에게 자정이 넘은 시각에 업무를 지시하는 등 '갑질'을 해온 것으로 드러나 또 다른 논란이 일고 있다.

협회에 장관 추천 인사 포함하고 #협회장 선출 규정도 변경 추진

11일 재해구호협회(재협)와 시민단체 등에 따르면 행안부는 재해구호협회 내에 의연금 사용을 심의·의결하는 '배분위원회'에 행안부 장관의 추천인을 위원으로 참여시키는 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배분위원은 현재 총 20명인데 행안부는 이 중 10명을 장관 추천 몫으로 채우려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협은 대한적십자사, 경제단체, 언론사 등 20여개 모금 단체가 이사진을 구성한 기구로, 국가 재난 상황에서 국민의 성금을 모으고 집행하는 일을 한다. 이사회 구성원들은 당연직으로 성금 집행을 결정하는 배분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데 행안부는 이 배분위에 외부 인사를 참여시키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재협 고위 관계자는 "행안부가 최근 직원을 동원해 '사무 검사'라는 이름으로 5년치 장부를 뒤졌지만, 자금 집행 등에 있어서 문제가 없었다"며 "사회단체와 언론사 대표들이 57년간 투명하게 운영해온 협회에 갑자기 행안부가 사무 검사를 하고 외부 인사들을 참여시키려는 저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행안부 이상권 재난복구정책관은 "재협 이사로 참여하지 않고 있는 외부 단체가 모은 성금도 재협에서 집행하는 경우가 있어서 배분위에 외부 단체도 참여시키려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협 측은 이에 대해 "외부 단체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한 곳 뿐인데 법 개정 없이도 언제든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으며, 최근 이사회 참여를 권유했으나 모금회 측이 고사했다"고 설명했다.

행안부가 만든 재해구호법 개정안의 일부. 배분위원장이 재해구호협회장을 맡는다는 표현이 포함돼 논란이 일고 있다.

행안부가 만든 재해구호법 개정안의 일부. 배분위원장이 재해구호협회장을 맡는다는 표현이 포함돼 논란이 일고 있다.

재협 측이 '행안부가 재협을 거머쥐려 한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행안부는 재해구호법 25조 3항 개정안을 만들면서 '배분위원장은 전국재해구호협회의 장이 되고… '라는 문구를 포함시켰다. 지금까지는 재해구호협회의 장이 배분위원장을 겸했다. 재협 관계자는 "장관 추천 인사들로 이사회를 장악한 뒤 협회장 자리마저 차지해 재협을 행안부 손에 넣겠다는 의도로 밖에는 해석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상권 정책관은 "해당 문구는 재해구호협회의 장이 배분위원장을 맡는 현재의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뜻"이라며 "해석상 오해의 소지가 있다면 문구를 '재해구호협회장은 배분위원장을 맡고'로 고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행안부 직원이 재해구호협회 직원에게 자정이 지나서 업무를 지시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갑질 논란이 일고 있다.

행안부 직원이 재해구호협회 직원에게 자정이 지나서 업무를 지시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갑질 논란이 일고 있다.

재협은 재해구호법에 따라 행안부의 관리·감독 하에 의연금품 배분, 회계감사 보고 등 긴밀하게 업무 협력을 한다. 행안부가 재협을 장악하려 한다는 논란이 불거지는 가운데 그간 업무 추진 과정에서 행안부가 보인 고압적 태도에 대한 폭로도 이어지고 있다. 재협 한 직원은 "털면 안 나오겠느냐" "없애버리겠다" "고발하겠다" 등 고압적 발언을 행안부 간부로부터 여러차례 들었다고 주장했다. 카카오톡 메시지 등 협회 자료에 따르면 행안부 계장급 직원은 자정이 넘은 시간에 업무를 지시하는가 하면, 특정 인사를 업무에서 배제하라는 등 부당한 지시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대해 행안부 측은 "업무 의욕 과잉으로 다소 거친 표현이 있을 수 있었으나 향후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뉴스1]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뉴스1]

행안부의 갑질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행안부 한 조사관이 경기 고양시 주무관을 감사하는 과정에서 차량에 감금하고 막말을 퍼붓는 등 '갑질'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파문이 일었다. 행안부 조사관은 이달 초 '비위 사실이 접수됐다'며 고양시 주무관을 불러내 개인 차량에 태운 뒤 1시간 30분여 동안 굴욕적인 취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조사관은 "이미 우리가 확보한 자료만으로도 (당신을) 끝내버릴 수 있다"고 윽박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이 조사관은 감사 업무에서 배제돼 대기 발령 상태이며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행안부 공무원의 갑질 파문이 커지자 김부겸 장관은 11일 전 직원에게 메일을 보내 "행안부가 앞장서 이 사회에서 퇴출시켜야 한다고 외치던 '갑질'과 부정부패 사건들이 정작 우리 안에서 잇따르고 있다"며 "이런 문제가 반복될 경우 반드시 책임을 물을 수 밖에 없음을 명심해 달라"고 경고했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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