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만 정치인가|송진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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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근 들어 정국의 가측성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당장 연말의 정국, 내년 초의 정국을 전망하기 힘들 뿐더러 노 대통령의 중간평가를 둘러싼 정국 전개는 통 추측조차 하기 힘든 형편이다.
정당들은 각기 본심을 굳게 감추고만 있다. 정부·여당은 중간평가를 언제, 어떤 방법으로 받을 작정인지 말이 없고 5공 비리의 수사나 조사의 범위에 대해서도 연내 매듭과 본격수사만 말할 뿐 입을 다물고 있다.
야당들은 더하다. 전씨 문제에 대해, 5공 청산의 마무리 문제에 대해, 중간평가에 대해 속셈을 털어놓지 않고 계속 유보적인 입장만 취하고있다.
전씨 문제에 대해서는 정치보복도, 형사처벌도 원치 않는다면서도 수사는 요구하고 동행 명령장을 발부할 작정이다. 5공의 조속한 청산을 외치면서도 그 시한이나 방법에 대해서는 말이 없고, 중간 평가에 대해서는 헌정 파행을 원치 않는다는 말을 하면서도 임기보장이란 말은 결단코 하지 않고 있다.
서로 뱃속을 내보이지 않고 으르고만 있는 형국이다.
이런 가운데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정당들의 관심은 오직 청문회뿐인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청문회의 주도권을 감고 당의 이미지를 높이느냐에만 전심전력하고 있다. 당 총재들이 직접 청문회에 나서는 의원들을 독려하고 테크닉을 일러주고 거당적으로 자료를 모아준다. 심지어 대통령까지 그 동안 청문회에서 우리 당이 밀리더니 이번엔 만회를 했다고 지대한 관심을 표한다.
청문회도 초기와는 달리 이제 TV 시청률도 떨어지고 차츰 식상감이 일고 있는데도 정치란 오로지 청문회밖에 없는 듯이 여기에만 매달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정국은 진전이 없고 정국전개에 대한 예측가능성은 뚝 떨어져 장차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신판 안개정국이란 말이 나올 판이다. 정치가 이처럼 청문회만 하고 있어도 괜찮은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청문회 말고는 아무 것도 할 게 없다는 것인가.
청문회는 물론 해야 한다. 청문회가 그 동안 5공의 실상을 국민에게 실감케 하고 의원발언의 질을 높이며 국민의 정치참여의 길을 여는 등 지대한 기여를 한 게 사실이다. 그리고 아직도 밝혀야 할 의혹이 많은 이상 앞으로도 상당기간 청문회는 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딱한 것은 청문회를 하면서 다른 일은 왜 좀 못하느냐는 점이다. 가령 악법개폐는 왜 않고 있는가. 선거 때 내건 그 현란한 공약들을 실천에 옮길 가장 요긴한 대목이었던 예산심의는 왜 그렇게 졸속으로 넘겼던가.
청문회를 하는 것은 5공을 청산하자는 것이고 5공을 청산하자는 것은 묵은 때를 벗고 새로운 민주질서를 세우자는 것이다.
새 민주질서를 법제화하는 가장 중요한 악법개폐까지 청문회 때문에 미루고 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악법개폐뿐 아니라 이 시절 정치가 해결하고 추진하고 고민해야할 과제는 수없이 많다. 학원은 들끓고 각계의 욕구분출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교육·치안·교통 등 어느 분야를 봐도 문제는 쌓여있다. 밖으로도 소의 감군 선언, 중소화해 등 의미를 분석하고 대응책을 강구합 일들이 허다하다.
당장 농민들이 당사 마당이나 당 총재의 집 앞에 고추 짐을 쌓아도 그 문제 하나 성실한 해결책을 못내고 있지 않은가.
정계가 스스로 결정할 문제도 많다. 이제 새해가 되면 지방자치제 실시는 목전의 문제가 된다. 그런데도 여야의 속셈이 현격하게 다른 이 문제를 놓고 여태 절충도 없고 입법논의도 감감 무소식이다. 정치자금 문제만 해도 고치자고 소리만 높였을 뿐 구체적인 노력은 아무 것도 없다. 개원 반년이 넘도록 국회 사무총장도 임명하지 못하고 있고 추곡수매가는 수매가 시작된 지 달포가 되도록 국회동의를 못 받고 있다.
이처럼 요즘 정치는 문제는 산적한데도 모두 외면만 하고 여야 어느 측도 해결을 모색하거나 부딪쳐보려는 움직임이 없다.
그저 관심을 쏟느니 청문회다.
청문회에서 인기를 높이고 표를 모아 보자는 정치가 주류가 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청문회마저도 본연의 기능보다는 정당간, 또는 정치인들간의 인기 경쟁장이 돼 수준이하의 모습이 속출하고있다.
이제 청문회는 청문회대로 하면서 할 일도 좀 해야하지 않겠는가. 청문회에 바빠 악법도 못 고쳐 내년으로 미룬다면 그 악법으로 인한 국민고통을 정치인들이 연장하는 것밖에 안 된다. 집시법 하나, 사회보호법 하나 못 고치면서 민주화를 말할 수는 없다. 또 5공 청산도 청문회라는 단선의 방법으로 다 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민주화의 큰 상을 국민 앞에 차려 내놓을 신기묘산을 정치인들이 갖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생일날 잘 먹으려고 이레를 굶다가 생일아침에 죽더라는 격이 돼서는 안될 것이다. 떡 벌어진 큰 상도 좋지만 한가지 한가지씩 착실한 행보가 중요하다.
청문회가 정치의 전부일 수는 없다. 할 일을 하고 짚어야 할 상황은 짚어야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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