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칼럼

다른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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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한나라는 무엇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 태극기와 애국가는 대한민국의 상징이다. 우리는 태극기를 보면서 가슴에 손을 얹을 때, '동해물과 백두산…'을 부를 때 내가 한국민의 일원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나라를 세운 인물들이 훌륭했다면 그 인물들이 나라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의 건국 조상들은 미국의 상징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러슈모어의 바위산에 조각된 대통령 상들도 그들 나라의 상징으로 아낌을 받고 있다.

군인도 나라의 상징이다. 그들은 국가라는 공동운명체를 위해 목숨을 내놓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이다. 군이라는 존재를 통해 나라의 울타리는 지켜진다. 그 울타리 안에서 나라의 구성원들은 재산과 생명.인권을 보호받는다. 울타리 안에서 미워하고 싸우고 물어뜯어도 그것은 같은 편끼리의 싸움이다. 그러나 울타리 밖은 우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의 존재는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전제가 된다. 나라다운 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병사의 목숨도 결코 소홀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군인의 생명을 국가만큼 소중하게 대접하기 때문이다. 수십 년 만에 발견된 유해일지라도 그들의 죽음이 국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성대한 의식 속에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번 평택 폭력사태는 이렇게 흐지부지 끝낼 일이 아니다. 군인들이 무장 시위대에 얻어맞고, 찔리고, 터졌다. 군복무하러 간 사랑하는 자식들이 당했다는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이는 대한민국이 얻어맞고, 찔리고, 터진 것이다. 국방부 장관은 "맞더라도 대응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대한민국은 맨몸으로 죽봉에 구타당하면서 멍들어 간 것이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다 얻어맞은 뒤 "폭력시위는 안 된다"는 한마디를 하고 외국 나들이를 떠났다. '국민의 이름'으로 재판하라던 대법원장은 또 어디 갔는가. 그는 기업인에 대한 형량이 가벼워 국민정서와 동떨어져 있다며 판사들을 압박했다. 그런 대법원장이 이번 폭력시위자의 70% 이상을 석방해 준 재판부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가 없다. 왜 불법폭력을 감싸는 판사에 대해서는 '국민의 이름'으로 재판하라고 말을 안 하는가. 대법원장이 생각하는 '국민'은 누구인가. 총리의 언행은 더욱 가관이다. "모든 당사자들이 한걸음씩 물러나 냉정을 되찾자"고 했다. 그의 눈에는 군인이나 폭력시위자나 똑같이 보이는 모양이다. 군인이 폭력을 당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야당은 제정신인가. 변변한 성명서 한 장이 없다. 당장 국방부 장관 해임건의안이 나와야 했다. 이런 사람들이 지금 이 나라의 지도자다.

이번 사태를 단순히 농민의 생존권 투쟁이니, 소수의 인권 투쟁이니 하는 식으로 예사롭게 취급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이번 사태의 본질에는 대한민국의 존재가 연결되어 있다. 폭력을 휘두른 자들은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허무는 데 그악스러웠다. 그들의 나라는 다른 나라인가 보다. 그들은 5.18을 거론한다. 그러나 군의 잘못된 리더십은 이미 법의 심판을 받았다. 그런데도 왜 줄기차게 군을 흠집 내려는 것일까. 태극기 대신 한반도기를 내걸고, 애국가 대신 아리랑을 부르는 사람들의 가슴에는 분명히 다른 나라가 있을 것이다. 과거사 진상을 규명한다며 대한민국 기관의 권위를 멍들게 만드는 행동들도 사실은 이런 것과 다 연결되어 있다.

좌든 우든, 진보든 보수든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같은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 그 울타리 안에서 누구나 똑같이 기회와 책임을 누리며 살아가겠다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아직 나라를 세우지 못한 것이다. 세계 10위의 경제력이면 무얼 하고, 첨단산업 국가이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런 것들은 바람이 불어오면 다 휩쓸려 갈 수밖에 없는 껍데기들이다. 이 껍데기의 화려함에 빠져 남북의 경쟁은 끝났다는 소리에 철없는 자들은 박수를 친다. 이 정권은 한편으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하자며 손을 내밀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을 구타한 자들을 보호하며 감싸고 돈다. 남북 철도를 연결한다, 정상회담을 한다, 지금 이 나라는 다시 북쪽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다른 나라를 기다리는 자들은 큰 바람이 불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문창극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