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영역의 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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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중소기업과 대기업간에는 서로 사업영역과 관련하여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정부에서 중소기업 고유업종이라고 선을 그어놓고 있는데도 사업영역에 관한 논란이 자주 벌어졌다.
최근에도 전경련이 몇몇 중소기업 고유업종을 해제해주도록 정부에 건의하는가 하면 기협중앙회는 이를 저지하기 위한 노력을 편 적이 있다. 중소기업의 존립기반에 관한 문제는 계속 심각한 현안과제가 되어온 셈이다.
이런 상황 속에 요즈음 신선한 바람이 일기 시작해 기업간의 분업, 발전에 좋은 징조로 여겨지다.
삼성·현대·럭키금성·대우 등 대그룹이 중소기업이 해도 될만한 업종을 단계적으로 중소기업에 넘겨주기로 한 것이다. 일부 대기업이 한때 두부·김치는 물론 실장갑까지 생산함으로써 비난을 받았으나 이제는 어른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직도 거머쥐고 있으면 사업성이 있는데도 과감히 중소기업에 넘겨주겠다는 것이어서 대견스럽다.
삼성의 경우 흑백TV 등 3백52 개 품목을 중소기업에 넘겨주기로 했으며 현대는 아직 중소기업에 안 넘어간 자동차부품을 이전키로 하고 선정중이며, 대우는 벽시계를 이전한데 이어 일부 잡화품목의 사업을 축소 조정 중이라고 한다.
대기업의 사업영역 조정은 물론 꼭 중소기업만을 생각해서 나온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기야 어쨌든 그 결과는 중소기업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된다. 삼성이 중소기업에 이전을 계획하고있는 3백52개 품목의 생산규모만도 1조5천억 원에 이른다.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에 새로 넘길 품목들의 전체 생산규모는 바로 중소기업의 새 활로가 된다.
국가경제를 위해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조화로운 공존이 불가결하다. 재론의 여지가 없이 대기업이 할 일이 있고 중소기업이 맡아야할 분야가 따로 있다. 경제 효율의 극대화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 고려에서 대·중소기업의 공존이 필요한 것이다.
그 때문에 중소기업 정책이 나오게되고 중소기업 고유업종까지 지정하여 중소기업을 보호하기도 한다. 제조업에서는 중소기업 없는 대기업, 대기업 없는 중소기업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물론 시장경제원리에 철저하다보면 양자의 구별 없이 경쟁의 논리에 따라 대기업이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대기업이 중소기업 업종을 하는 경우 기술개발·품질개선이 빠르게되어 이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소기업도 어느 정도 자본의 취약성이 극복되었고 기술개발능력을 갖추게된 만큼 그 설 땅을 더 넓혀주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대기업들이 많은 품목을 중소기업에 넘겨주기로 한 것은 경제민주화에도 부응하는 일이라고 본다. 경제민주화의 궁극목표가 보다 많은 국민이 국민경제의 발전에 참여하고 그 혜택을 고루 받게 하는데 있기 때문에 기업들도 대 소 구별 없이 능력이 있으면 성장 할 수 있게 뒷받침 해주어야 한다.
대기업은 중소기업품목들을 넘겨주는 것으로 그칠게 아니고 자금·기술·유통 면의 중소기업 취약성을 대기업이 도와 업종이전의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계속 배려하는 것도 중요하다.
대기업들은 이제 대국적 견지에서 중소기업영역을 넘기는 이상 세계굴지의 기업들과 겨룰 의기를 펴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기업 합병을 통해 세계 기업과의 경쟁을 선언한다 든가 2000년대의 비전을 제시하는 대기업의 움직임은 밝은 징후이며 중소기업들도 새로운 영역 확보에 따른 새로운 각오와 무거운 짐을 자각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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