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거리는 일본어|김영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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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지난8월 대학생과 교사들도 해외 연수를 떠나는 세상이니까 주부들도 견문을 넓히고 세계를 돌아 볼 권리가 있다는 남편의 개방된 세계관(?)에 의해 3박4일의 일정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여행에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가슴 한 켠에 돌을 매달아 놓은 듯 무거웠지만, 「기회는 찬스다」싶어 뻔뻔스럽게(?) 따라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묘한 일은 한국을 떠나기 전 나라안이 온통 올림픽 준비로 여념이 없었는데 일본에 도착하고 보니 그곳도 올림픽 열기가 대단했다.
공항버스에 비치된 책자에 우리 나라의 남대문·동대문시장과 이태원을 소개하는 화보가 가득하고 TV는 연일 한국특집을 내고 있었다.
하루는 남편의 일본인친구집에 초대받아 가게 됐는데 그집 주인이 한국특집이라며 TV를 틀어주는 것이었다.
그 프로그램은 일본의 스케이트 선수가 올림픽에 출전하는 한국의 싱크로나이즈드 선수의 서울 집을 방문해 취재한 내용이었다..
그 선수의 가족들과 식사하면서 이것저것 묻는 일본 소녀와 자연스럽게 밥을 먹으며 영어로 대답하는 우리 선수, 또 선수에 대한 뒷바라지와 기대를 한국어로 편안하게 얘기하는 어머니·여동생·남동생들이 참으로 여유있고 의젓하게 화면에 비쳐졌다.
그런데 한국선수의 친척인 듯한 노인에게 마이크를 댔더니, 그 노인은 올림픽에 관한 얘기를 더듬거리는 일본어로 하는 것이 아닌가.
주름진 입가에서 흘러나온 일본어가 나에겐 기억하기 싫은 과거를 되살리는 고통을 주어 착잡한 느낌을 주었다.
내 나이 또래 전쟁을 모르는 전후세대가 과거의 역사를 얼마나 알까만 정말 그의 서투르고 슬픈 듯한 목소리의 일본어는 나로 하여금 잊고싶은 과거가 들춰내지듯 당혹과 수치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올림픽을 훌륭히 치러낸 국가로서의 자긍심을 바탕으로 이러한 과거의 잔재를 의식으로부터 몰아내야 할 것이다. 그날 화면에 비쳐진 밝고 당찬 모습의 한국 어린 선수들의 눈동자는 그런 희망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대교아파트 3동3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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