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의학도에 문학의 향기 심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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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17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의과대학 강의동 101호실의 분위기는 평소와 사뭇 달랐다.

임상실험 결과 보고와 물리.화학.생물학 강의 등 오차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차가운' 의대 수업 대신 서머싯 몸.라블레.안톤 체호프 등 작가이자 의사였던 이들의 이름이 오르내리는가 하면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는 문학과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학의 공통점을 논하는 낯선 강좌가 진행됐다.

강의동에 모인 의대 본과 2학년생 21명을 긴장시킨 강좌의 이름은 '문학과 의학'. 예과.본과 6년과 인턴.레지던트 과정 등 10년이 넘도록 이어지는 수련에 파묻혀 자칫 편협하고 외곬으로 되기 쉬운 의학도들에게 문학의 향기를 불어 넣자는 취지로 연세대가 국내 의대로는 처음으로 이번 학기에 개설한 과목이다.

토론식으로 진행된 이 강의의 강사진 중에는 수강생들의 연세대 의대 선배인 마종기(馬鍾基.64)시인이 끼어 있었다.

아동문학가 고(故) 마해송(馬海松)선생의 아들로, 대학을 졸업한 뒤인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진단방사선과 전문의로 미국 의료계에 뿌리내린 馬씨는 지난해 6월 현직에서 은퇴했다. 그는 모교의 강의 제의를 받고 흔쾌히 응낙했다.

도미(渡美) 전 이미 등단 시인이었던 馬씨는 황동규.김영태씨와의 공동시집 '평균율' 1.2(68년.72년)를 비롯,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80년), '조용한 개선'(96년),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2002년) 등 웬만한 전업 시인에 못지않게 정력적으로 시를 쏟아냈다. 후배들을 위한 '문학과 의학' 강의에 누구보다 적격인 셈이다.

馬씨는 "의과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국가고시인 MCAT 시험에 영문과.미학과 등 인문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학생들의 합격률이 4년제 의대 졸업생들의 합격률에 육박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미국 의료계의 문학에 대한 관심은 과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의술의 허점을 메우려는 노력일 것"이라며 "특히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술이나 마약.섹스 등에 탐닉하게 되는 의사들이 미국에 많은데 문학을 가까이 하는 것이 그 같은 파국을 막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馬씨는 미국에 가기 전 "앞으로 5년 동안은 시작(詩作)을 접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물론 의사 수련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미국에서 의사 생활 첫날 여덟명의 담당 환자가 죽어나가는 처참한 경험을 하고 나서 시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는 고백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馬씨는 밤을 새워가며 시를 썼고 그런 노력의 결과로 일년에 여덟편에서 열편 정도의 시를 건질 수 있었다. 馬씨는 "그런 지난한 시 생산 작업이 지금 돌이켜보면 괜찮은 의사가 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투명한 순수성의 공간'의 시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단의 평가를 받는 馬씨는 강의 제의를 받기 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려고 했었다. 시 창작에 전념하기 위해서다.

馬씨는 "능란한 시어와 기교를 구사하는 한국에 있는 동료들에 대한 열등감을 떨쳐버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내가 반대했고, 결국 강의가 없는 방학 중에는 미국으로 돌아가 있기로 했다.

"시인과 의사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어떤 걸 고르겠느냐"는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인 馬씨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며 즉답을 피했다.

신준봉 기자<inform@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shin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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