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당 도서비 8백77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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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동양사회의 관료 엘리트 전형 기준은 전통적으로 신언서판에 기초를 두어 왔다. 행동 거지, 말씨, 독서 량, 판단력이 한 사람의 인간 됨을 평가하는 기본적인 자(척)가 되어왔고 이러한 기준은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도 효력을 발휘하는 인간평가의 중요 덕목이 되고 있다.
여기서 행동과 언어는 한사람의 외형적 면모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고 독서와 판단력은 그 사람의 내면적 세계를 측정하는 단서가 된다. 『말과 행동은 번지르르한데 속은 텅 비었더군』이라고 한 사람을 평가해버릴 때 이 말은 외형은 근사하지만 알맹이가 텅 빈 쭉정이 인간이라는 매우 모욕적인 인간 평가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내면 세계는 어떤 경로를 거쳐 형성되는가. 사고와 판단을 다듬어 가는 것이 한사람의 정신세계를 연마시키는 가장 기초적 훈련이다. 사물에 대한 판단과 그에 따른 가치관의 형성, 이것이 되풀이되어 수정과 발전을 거침으로써 경우에 따라서는 성인의 반열에 오르기도 하지만 대부분 건전한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갖추는 요건을 획득하게 된다.
독서란 바로 이 사고와 판단을 연결시켜주고 새로운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사고의 능력을 활성화시켜줌과 동시에 올바른 판단력을 키워주는 촉진제와 길잡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맡게 된다. 독서를 통한 사고력의 증진과 올바른 판단력의 형성, 이것이 한 사람의 내면 세계를 규정하는 바로 미터가 된다.
그러나 우리의 독서 현실은 얼마나 참담한가. 올림픽 개최 국 세계 4위, 기적 같은 경제성장, 1백억 달러의 무역흑자라는 정말 놀라운 외형적 급성장에도 불구하고 내면적 성장은「독서 후진국」이라는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출판문화 협회가 발표한 한국인의 가계별 월 평균 지출 내용을 눈여겨보면, 한약 대금 3만2천4백60원, 화장품 값 1천1백27원, 영양제 구입비 1천1백76원에 비해 도서 구입 비는 8백77원(본보 10월25일 자)으로 나타난다.
한은이 조사한 오늘의 소비구조도 유사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전반적 소비구조가 고가·고급화되는 추세이고, 식품·레저비의 지출이 지난 상반기 중 40·5%가 상승되는 외형적 과시형 소비패턴임을 지적하고 있다.
육체적 건강과 아름다움에 대한 투자가 중요한 그만큼 정신적 건강과 사고의 성숙, 건전한 판단력, 또한 그 이상으로 중대함에도 불구하고, 도서 구입 비의 40배에 달하는 월 3만여원의 보약 재 구입 비라는 놀라운 도시 생활인의 소비패턴은 외형적 성장만을 강조해온 오늘의 우리사회를 단적으로 노출시키는 증거물이 되지 않는가.
값진 보약으로 축적된 활력 넘치는 건강미와 유창하게 쏟아지는 구변들을 우린 요즘 자정이 넘도록 텔레비전 앞에서 『저럴 수가 있는가』를 연발하고 비분강개하며 지켜보고 있다. 목적은 그래도 순수했으니 남의 돈 좀 긁어모았다고 해서 무슨 죄가 되느냐 식의 강변이 난무하는 청문회의 그 유명했던 인사들의 신언서판을 지켜보면서 하루 독서시간 1시간 남짓의 평균 독서시간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젠 정말 교언영색의 신언 보다, 알맹이 없는 외형적 성장보다는 사고와 판단, 서판을 중시하는 내면적 성장을 우리 함께 키워나가야 할 때다. 그러기 위해 우린 책을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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