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조사 중단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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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서울을 비롯한 각 시·도 행정기관이 만18세이상의 전국민을 대상으로 무려 78개항에 이르는 신상자료를 요구, 큰 의혹을 사고 있다. 정부의 주민등록 전산화 계획으로 실시중인 신상자료 요구항목 중에는 대상자들의 직장이나 직책, 학력과 학교명, 심지어 질병, 집 전화번호까지도 들어 있어 국민의 사생활 침해는 물론이고 다른 용도로 악용될 우려를 낳고 있다.
이를테면 순수행정목적이나 행정수행상 편의나 참고에 그 뜻이 있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필요이상의 개인 정보를 요구하고 있으며 공개되어서는 안될 사적인 사항을 입력함으로써 국민을 발가벗기려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게 한다.
현행 주민등록법은 주민등록제의 목적을 주민의 거주관계를 행정기관이 파악하고 인구의 동태를 명확히 해 행정사무의 적정한 처리에 두고 있으며 신고사항도 12개 항목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12개 항목이란 개인의 성명과 성별·본적·주소·병역, 그리고 대통령령이 정하는 특수기술에 관한 사항이 고작이다.
특수기술에 관해 기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유사시에 필요할지도 모를 국가인력자원의 관리와 실태 파악을 위해서다.
주민등록법이 이처럼 국민의 신고사항을 뚜렷이 명시하고 있는데도 무슨 근거로 78개항으로 멋대로 늘렸으며 그 많은 신상명세를 수록해 두었다가 어디다 쓰려는 것인지 저의를 의심치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지난날 어두운 정치사에서 당국이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나 약점 등을 악용해 탄압하고 인권을 유린했던 숱한 사례들을 기억하고 있으며 역대 어느 선거에서도 관권개입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개인의 밑바닥까지 훤히 알고 있어야만 행정수행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으나 사용목적도 분명치 않고 관계법에 위배되고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사생활권 마저 침해하는 이번 조사는 당연히 백지화되고 진상이 규명되어야 한다.
관청이 하라면 무조건 따르고 법의 근거도 없이 마구 밀고 나가던 행정만능의 시대는 이미 지나지 않았는가. 또 다시 이번과 같은 탈법행정이 자행되지 않기 위해서도 어느 누구의 발상이고 동기와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밝혀져야 할 것이다.
이에 덧붙여 컴퓨터 시대에 부합하는 사생활보호법 제정 등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의 침해를 사전에 예방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헌법은 모든 국민이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사생활의 공개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런데도 요즘엔 치안본부, 국세청 등 국가행정 전산망과 금융, 의료, 신용카드회사와 개인기업체 등의 거미줄 같은 전산망 보급으로 이용자의 의도에 따라 개인의 사적사항이 무제한으로 공개되고 노출될 위험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개인에 관한 자료의 공개나 이용을 제한하고 안전하게 보호토록 하는 내용의 사생활보호법이 마련되어야 한다.
민주당도 이번 정부의 전산화 계획에 시정을 촉구했거니와 시정이나 관심표명에 그칠게 아니라 여야 합의로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보장하는 관계법 제정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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