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자원전쟁 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소비 대국 미국·중국은
아프리카·남미로 유전 찾아 가쁜 숨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27일 나이지리아 순방 도중 뜻하지 않은 상황으로 잠시 연설을 중단해야만 했다. 나이지리아 의회 연설 도중 "중국은 여전히 개발도상국"이라고 말하자 근엄하게 앉아 있던 의원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기 때문이다. 후 주석의 발언은 외국 순방길에 늘 하는 의례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나이지리아 의원들에게 중국은 이미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초강대국이었다. 그런 중국을 개도국이라 칭했으니, 의원들이 후 주석의 발언을 농담으로 알아들은 게 당연했다. 한 의원은 "눈 한번 깜짝 않고 우리나라 유전 4곳에 40억 달러를 투자하고, 미국에서 보잉 여객기 80대를 한꺼번에 사들이는 중국이 개도국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자원 소비 대국 중국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 중국의 전방위 자원 공략=지난해 유독 중남미 공략에 공을 들였던 중국이 올해는 중동과 아프리카로 눈을 돌리고 있다. 리자오싱(李肇星) 외교부장은 새해 벽두부터 아프리카 순방길에 올랐다. 목적은 단 하나. 자원 확보였다. 성과는 컸다. 나이지리아.앙골라.가봉.수단 등 아프리카의 주요 석유 수출국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다. 석 달 뒤엔 후 주석이 직접 나섰다. 모로코.나이지리아.케냐를 돌며 대규모 유전 개발 계획을 잇따라 성사시켰다. 그렇다고 중국이 중동 지역을 결코 소홀히 다루는 것도 아니다. 후 주석은 아프리카 순방에 앞서 사우디아라비아를 먼저 방문해 무려 52억 달러(약 5조원)어치의 유전 개발 계약을 체결했다.

◆ 조바심 내는 미국=중국의 공격적 행보에 워싱턴도 잔뜩 긴장하고 있다. 몇 안 되는 에너지 공급처를 장악하기 위해 중국과 건곤일척의 싸움을 앞두고 있지만 국제 환경이 결코 미국에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최대 공급처인 중동 지역에서 수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미국은 국가안보 차원에서 중동에 대한 석유 의존도를 최대한 낮출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런데 그 틈새를 중국이 집요하게 뚫고 들어가고 있어 미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아프리카도 마찬가지. 제1의 석유 공급선을 중동에서 아프리카로 옮기려는 작업이 진행 중이지만 이미 중국이 '침을 발라놓은' 상황이어서 공략이 쉽지 않다. 베네수엘라.볼리비아 등 중남미 국가들도 반미를 외치며 미국에 등을 돌렸다. 당황한 미 정부는 최후의 보루로 남겨뒀던 알래스카 개발 카드까지 꺼냈지만 민주당과 환경단체의 결사적 반대에 부닥쳐 꼼짝달싹 못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중국의 공세에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거라고 보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미 정부는 이미 아프리카와 중남미 국가를 겨냥해 대대적인 투자를 미끼로 환심 사기에 나섰다. 초강대국 미국과 중국의 자원전쟁은 이제 시작인 셈이다.

박신홍 기자

자원 부국 러시아·남미는
"공급 중단" 무기
국제사회 큰 소리

국제 유가 폭등세를 타고 자원 부국들의 콧대도 높아지고 있다. 석유.천연가스의 국유화는 기본이고, 걸핏하면 에너지 공급 중단이란 카드로 수입국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고 있다. 러시아.베네수엘라.볼리비아가 대표적인 사례다. 석유를 무기로 핵 도박을 벌이는 이란도 빼놓을 수 없다.

◆ 남미발 '국유화 도미노'=볼리비아 정부는 2일 광물.삼림 자원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이 전날 석유.천연가스에 대한 국유화 조치를 발표한 지 불과 하루 만이다. 다국적 기업들이 보유한 자원에 대한 사실상의 통제권을 볼리비아 국영 에너지 기업(YPFB)에 넘기든지, 아니면 6개월 내에 떠나라는 엄포에 이은 조치다. 브라질 국영 석유회사인 페트로브라스와 스페인-아르헨티나 합작기업인 렙솔 YPF 등이 대표적인 '피해자'다. AP통신은 2일 "세계 에너지 공급 측면에서만 보면 볼리비아의 이번 조치는 큰 영향을 미치진 못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나라의 원유 매장량이 대단한 수준이 아닌 데다 천연가스 역시 베네수엘라에 이어 남미 2위라곤 하지만 세계적으론 큰손에 끼지 못해서다.

문제는 이른바 '국유화 도미노'다. 모랄레스의 이번 발표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조치와 쏙 빼닮았다. 차베스는 3월 말 자원 국유화를 선언했다. 외국 기업이 참여하고 있는 32개 유전 개발사업의 지분 60%를 베네수엘라 석유공사(PDVSA)에 넘기도록 하는 내용이다. 끝까지 버틴 프랑스의 에너지 기업 토탈과 이탈리아의 에니는 결국 쫓겨났다. AP통신은 "다른 자원 수출국이 베네수엘라.볼리비아의 뒤를 잇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전망했다.

◆ 유럽 협박하는 러시아=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달 말 "(유럽에 집중된)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선을 아시아로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인 가스프롬의 센트리카(영국 최대 가스업체) 인수를 영국 정부가 법 개정을 통해 막으려 한다는 보도에 대한 반발이다. 이에 앞서 가스프롬의 알렉세이 밀러 회장도 유럽에 대한 가스 공급을 중단할 수 있다는 협박성 성명을 내놓았다. 러시아는 유럽이 소비하는 가스의 25% 이상을 공급하고 있다.

러시아는 국제채권국 모임인 '파리클럽'에 진 빚 290여억 달러를 연내에 모두 갚아 버린다는 계획이다.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벌어들인 돈이 넘쳐난다는 증거다.

이란이 전 세계를 상대로 핵 도박을 벌일 수 있는 것도 세계 4위 산유국이란 위치 덕분이다. 모하마드 하디 네자드 호세이니언 이란 석유차관은 2일 "올 겨울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우리는 석유를 무기로 사용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 게 현실이다.

김선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