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언 치안이 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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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탈주범들의 비극적 자살로 일단락 된 이번 사건의 시말을 보면 사건이 끝났다는 안도보다 착잡하고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올림픽을 세계적 수준으로 치렀다는 나라의 치안이 고작 이 정도인가 하는 허탈감과 이런 치안능력에 과연 우리의 생명과 안위를 의탁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깊은 우려와 회의를 갖게 한다. 나라의 틀이 제대로 잡혀있는지, 그 사회는 얼마나 안정되어 있는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곧 치안상태인데 10여만명의 경찰이 7명의 탈수범들에게 장장 8일 동안이나 농락 당하는 통제력의 부재를 본 국민들은 두렵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이 이번 사건에서 받은 충격과 불안은 탈주사건 그 자체에도 있었지만 그보다 우리사회의 안전이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고 정부의 범죄 억지력이 무력하다는 걸 새삼 확인한데 있을 것이다.
신원은 물론 얼굴 생김새나 수법까지도 훤히 아는 몇 안 되는 탈주범을 잡는데도 이 지경인데 훈련되고 무장한 첩자라도 출몰한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
탈주범 몇 명에 나라가 온통 뒤집히다시피 하고 반상회와 호구 조사가 실시되고 곳곳의 교통이 막히고도 못 잡는 치안이라면 치안은 없는 거나 같다.
탈주범들은 경찰의 비상령과 철야 총력수사, 밀집수색망과 번개작전 등 별의별 작전과 수사망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가정집을 다섯 차례나 침입, 인질극을 벌였고 그사이에도 원정강도를 두 차례나 했다.
노상강도를 당한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했지만 중간에서 묵살됐고 그 요란했던 입김과 검문검색에 단 한번도 걸려들지 않았다. 나는 탈주범에 벌벌 기는 경찰이었다. 서울 신촌 근방에서는 경찰이 범인들이 숙박한 집을 몇 차례나 들렀으나 인터폰 확인에 그쳤다. 독 안에 든 쥐를 이 같은 무성의와 무책임으로 잡을 기회를 몇번이나 놓쳤다.
시민의 제보에만 의존하는 수사, 제2, 제3의 범행만 기다리는 수사로 마지막 순간에도 탈주범들을 잡지 못하고 자살로 끝나는 무능을 드러냈다. 그것마저 인질을 당한 집주인의 용감한 신고가 없었다면 부지하세월이 될 뻔했다.
이처럼 이번 사건은 경찰이 범죄꾼들에게 얼마나 무기력하고 무능하며 비과학적이고 비조직적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데모진압과 시국사범 잡는데는 그토록 용감하고 기민성을 보였고 정치사범에는 놀랄 정도로 집요했던 경찰이 일반 범죄에는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가 하는 실체를 남김 없이 보여 주었다.
경찰의 실체가 극명하게 드러남으로써 국민들에게는 불안과 실망을 안겨주었지만 역으로 잠재적 범인들에게는 무슨 짓을 해도 되겠구나』하는 용기를 심어주었다.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바로 이점이다. 경찰이 보인 무능과 무책임의 이미지가 초래할 범죄의 증가와 촉진에 대한 심각한 걱정이다.
죄지은 자는 반드시 잡히고야만다는 의식은 범죄를 할 엄두를 못 내게 하는 예방효과의 첩경인데 허수아비 형상을 보여줌으로써 앞으로 그 후유증과 부작용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후유증은 이미 며칠 전에도 나타났다. 집총한 경찰이 골목마다 지키고 있는 비상령 속에 탈주범을 자칭한 편승 강도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정부는 이번 사건의 교훈과 표출된 문제점 등을 빠짐없이 점검, 과감한 수술과 근본대책을 수립해야할 것이다.
교도행정과 형사정책을 포함한 형사사법제도 전반에 관한 개혁과 쇄신도 뒤따라야하고 치안체제의 혁신과 전환도 이루어져야 한다.
정부예산을 자그마치 건설부예산과 맞먹는 1조원이나 쓰고 경찰병력이 12만명이나 되면서도 민생치안이 이 정도가 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부터 심층 분석해야할 것이다.
유능한 경찰인력과 장비와 예산을 정권안보에 집중시키고 나이를 고친 타락한 고위경찰간부들이 득실거리는 경찰풍토에서 바람직한 민생치안은 기대할 수 없다.
경찰체제의 대폭 개편과 일대수술을 과감히 단행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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