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바초프」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보수파 원로들을 정치국으로부터 제거하고 최고회의간부회의장(국가원수)으로 선출된 것은 장기전략 이라기보다는 선제공격으로 보인다고 모스크바의 분석가들은 말했다.
「고르바초프」서기장이 중앙위와 최고회의를 긴급 개최한데 대한 의구가 계속되는 가운데 모스크바에서는 그가 당 보수세력의 있을 수도 있는 공세에 반격을 가할 것이라는 추측도 나돌았었다.
85년3월 소련의 최고지도자가 된 이후 지난달 30일 정치국을 단호하게 개편함으로써「고르바초프」는 13인으로 구성된 소련의 최고권력기관내의 세력균형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그는「브레즈네프」시대의 원로인「그로미코」와「솔로멘체프」를 은퇴시키고 크램린의 제2인자인「리가초프」의 직위를 바꿈으로써 이들의 권력을 무력화시켰다.
KGB(국가보안위원회) 회장인「체브리코프」가 1일 경질됨으로써 KGB는 더 이상 정치국내에 기반을 갖지 않게 됐으나「악렉산드르·블라소프」내상이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돼 최고권력기관인 정치국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동시에 정치국원을 12명으로 줄이고 개혁지지자인「메드베데프」를 정치국원으로 임명, 「고르바초프」파는 정치국내에서 다수세력을 점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업저버들은「고르바초프」가 지난 16년 동안 정치국원으로 있으며 강한 지역세기력반을 가진 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인「블라디미르·시체르비츠키」를 제거시키는데는 실패했음을 주목했다.
서방외교관들은「고르바초프」가 이론담당인「리가초프」에게 농업을 담당시킨 것을 87년10월「옐친」사건으로 야기된『리가초프」와의 싸움』에서「고르바초프」가 승리한 것으로 보고있다.
「고르바초프」가 왜 서둘러 국가원수 직을 차지했느냐에 대한 추측이 계속 나오고 있는 가운데 소련의 한 주간지는「흐루시초프」아들의 비망록을 발췌, 보도했다.
60년대 후반에 쓰여진『「세르게예비치·흐루시초프」비망록』은「흐루시초프」가 당 지도층을 신진세력으로 교체하려고 준비하는 동안 64년 중앙위에서 표결로 서기장의 자리를 물러나게 됐다고 분명히 시사했다.
「흐루시초프」는「브레즈네프」「이그나토프」「포드고르니」와 KGB가 공모, 자신의 아버지를 제거시켰다고 전했다.
【AFP 연합=본사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