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과거사 정리 다소 늦은 것 같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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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화해는 나눔에서 시작됩니다."

스테파누스 스쿠만 주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사진)는 우리보다 앞선 '과거사 정리'의 경험을 이렇게 요약했다. 27일로 남아공은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취임한 지 꼭 12년째를 맞는다. 남아공은 흑백 차별 정책이 종언을 고한 이 날을 '자유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이후 12년간 남아공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지난해 7월 부임한 스쿠만 대사는 그 변화의 최일선에 있었다. 백인 정권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그는 만델라 정부에서 토지부 차관으로 일했고, 야당 지도자가 된 데 클레르크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그에게 있어서 이 기간은 '끝없는 대화와 타협의 과정'으로 기억된다.

스쿠만 대사는 "특히 과거사 정리는 고통의 연속이었다"고 회고했다. 남아공은 흑백 차별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해 진실.화해위원회(TRC)를 설치했다. 그리고 진실을 고백한 가해자는 사면을 해줬다. 다수의 흑인 피해자들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대신 백인들은 국가 경영의 노하우를 흑인들에게 전수하고 정부 운영에 적극 협력했다. 그 과정에서 숱한 갈등과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대화의 판이 깨지면 서로가 손해'라는 데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기 때문에 쉽게 합의를 이룰 수 있었다. 스쿠만 대사는 "넬슨 만델라 등 국가 지도자들의 끈질긴 설득과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설명했다.

화해와 통합의 효과는 경제 발전으로 나타나고 있다. 1994년까지 1%를 밑돌던 남아공의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2003년 이후 4%를 넘어섰다. 2001년 이후 30만 명의 흑인들이 중산층으로 편입되는 등 흑백 간 경제 격차 해소 정책도 서서히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지난해 말 출범한 한국의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여러 모로 남아공의 TRC와 닮았다. 하지만 스쿠만 대사는 "한국과 남아공의 상황은 분명 다르다"며 직접적인 비교는 사양했다. 그는 "남아공은 통용되는 언어가 11개나 될 정도로 인종 구성이 다양해 국민 통합에 어려움이 많았다"며 "그런 면에서 한국은 축복받은 나라"라고 말했다. 다만 "이미 진실을 증언할 사람들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을텐데, 남아공과 비교하면 시기적으로 좀 늦은 것 같다"고 우려했다.

남아공 대사관은 올해 '자유의 날'을 기념해 사회복지시설인 동명아동복지관과 자매결연을 했다. 나눔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다. 29일 열리는 축하 행사에도 복지관 식구들을 초청했다.

스쿠만 대사는 재직 중 꼭 이루고 싶은 일로 자유무역협정(FTA) 성사와 경제 교류 확대를 꼽았다. "특히 한국의 기업들을 남아공으로 유치하고 싶습니다. 와인을 비롯해 농산물 수출을 늘리는 것도 꿈입니다. 아직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아공 와인은 정말 훌륭하거든요."

글=조민근 기자, 사진=신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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