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직후 혼란 수습 ...헌정사의 산증인|타계한 전 과도정부 수반 우양 허정씨의 생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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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8일 별세한 허정 전과정수반은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여한 후 중국과 미국에서 이승만박사와 더불어 항일독립운동을 했고 건국초기에는 제헌의원 (부산초량)·서울시장·교통사회부장관 및 국무총리서리를, 그리고 4·19직후 외무장관으로 입각, 이대통령 하야 후 과도정부수반으로 혼란기를 수습한 한국헌정사의 산 증인이다.
특히 4·19직후의 권력공백기에 과도정부 수반으로 무리와 사심 없이 국정을 수습, 민정이양을 순조롭게 한 것이라든가, 5· 16후 민정이양 때 윤보선 전대통령과 야권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으나 야당 단일후보라야 박정희 후보를 이길 수 있다며 미련 없이 사퇴한 것은 사심 없는 정치인우양의 면모를 보인 것으로 평가되고 다.
우양은 그 이후 국정자문위원· 통일원 고문회의 의장을 지내면서 구 정치인으로선 보기 드물게 「오염」 되지 않은 처신을 해와 후배 정치인은 물론 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아왔다.
우양은 1896년 부산에서 무역중개업을 하는 허문일씨의 5남1여중 3남으로 태어났다.
초량사립학교와 보성중학교· 보성전문 (고대전신) 법과를 졸업한 우양은 3·1운동 참가 후 상해로 망명, 임정에 참여했다.
그 후 프랑스를 거처 미국으로 건너간 뒤 배미한인교민총단장 (22년)·삼 일 신보사장을 지내며 항일운동을 했고 32년 귀국, 흥업구락부사건 (38년)·조선어학회 사건 등으로 일경에 끌려가 고문을 받기도 했다.
5·16후 민정이양과정에서 윤보선·이범석·김병노씨와 함께 야권단일 후보를 내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국민의 당을 창당했으나 파동 끝에 두 조각났다. 결국 우양은 윤보선씨와의 후보단일화 사전조정실패로 63년 가을 나란히 출마했으나 단 한차례의 지방유세 후 윤씨의 국민적 인기가 더 크다는 점을 인정하고 야당후보의 단일화를 위해 선선히 사퇴했다.
우양은 야당의 한일회담 반대투쟁 때 홀로 침묵을 지켰고 그 후 월남파병지지발언, 한일협정비준 후 총 사퇴한 야당의 원내복귀를 주장하는 등 야당인사로서는 앞장서기 힘든 말을 두려움 없이 했다. 그는 『정치에 기교는 필요치 않다』 고 주장해 「무기교의 정치인」 이란 평을 듣기도 했다.
부인 백귀난여사와 83년 사별한 후 아들과 함께 살면서 정원 돌보기 등으로 소일해 왔다. 유족은 아들 준씨(52·외은이사)와 딸 원씨(55)등 1남1녀. 『내일을 위한 증언』 이란 자서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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