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脫한국 신드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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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한국 사회에 지쳤다' '한국을 포기하고 싶다'는 말들이 외국인도 아닌, 우리의 30, 40대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현실은 분명 충격이다.

얼마전 북새통을 이룬 '해외이주 이민박람회'의 한 상담 책임자는 "한국을 떠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줄은 미처 몰랐다"고 혀를 내둘렀다.

직장도, 자녀교육도 희망이 없다며 한국을 등지려는 이민열풍은 아직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 사회적으로 걱정할 수준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기회가 되면 이민가겠다'는 사람이 20대와 30대의 절반이 넘는 현실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 필승 코리아'와 '대~한민국'을 소리높여 복창했던 이들이 아닌가. 한국인들이 세계로 뻗어가면 그 자체가 국력이고 한민족 네트워크로 글로벌 코리아의 발판이 된다는 소박한 기대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작금의 이민 열풍은 우리 사회의 건강을 근저에서 흔드는 탈(脫) 한국 신드롬(증후군)의 구체적 증세라는 점에서 충격은 더한다.

최근의 이민 열풍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생계형 이민이 아니고 보다 나은 삶과 교육을 위한 탈출형 이민이라는 점이 특히 그렇다. 사오정(45세 정년)과 오륙도(56세 직장인은 도둑)로 상징되는 불안정한 고용구조는 젊은 세대에 장래에 대한 극도의 불안을 안긴다.

특정지역의 집값 폭등으로 박탈감은 더하고, 설령 강남에서 살인적 교육비를 들여 명문대에 합격시킨다 해도 졸업 후 반듯한 일자리를 갖는다는 보장도 없다.

더욱 심각한 것은 20대 및 30대 전문직들이 이민 열풍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 점이다. 젊은 일꾼을 사회가 보듬지 못하고 바깥으로 내모는 격이다. 인력과 그에 따른 외화유출은 국가경쟁력 약화와 직결된다.

연수 및 유학에 따른 해외송금은 해마다 급증해 지난해에 55억달러를 넘었다. 초.중.고생의 조기유학은 지난해에 1만7천명으로 '기러기 아빠'들을 양산하고 있다.

'영어 하나만 건져도 성공'이라고 다투어 몰려가지만 교민 2세들마저 어느 수준에 가면 영어에 벽을 느끼는 원어국의 현실을 이들이 알 턱이 없다.

이민이 곧 성공이라는 보장도 없다. 실패하거나 적응을 못해 되돌아오는 '역이민'도 매년 15% 속도로 늘고 있다. 조기유학이 '조기에 아이를 망칠 수 있다'는 해외동포들의 경고도 그치지 않는다.

본국의 어려운 현실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외국 가서 잘 헤쳐나가기는 쉽지 않다. 이들이 외국 가서도 헤매고 산다면 코리안 네트워크는커녕 '국제적 떠돌이'를 양산할 뿐이다.

탈 한국은 이민뿐이 아니다. 한국이 '노조공화국'으로 인식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흔들리고, 우리 기업의 생산거점이 속속 해외로 옮겨가면서 제조업의 공동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우리가 안보를 의존하고 있는 주한미군은 미국 병사들이 가장 근무를 꺼려하는 해외근무지로 손꼽힌 지 오래다. 왕성한 외국인 주식투자와 주가 상승은 뭔가 하고 반문할 법도 하다. 그러나 이들 투자자본은 '열매 따먹기' 단타매매에 극성일 뿐 열매가 신통찮으면 언제라도 빠져나가는 속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국 탈출 신드롬은 한마디로 우리 사회의 건강에 적신호다. '어버이 같은 직장'이 사라지고 사회안전망 또한 엉성하기 짝이 없다.

그럴수록 편가르기보다 모두를 아우르며 일자리를 창출하고, 고용구조를 합리화하고, 집값 안정과 교육여건 개선으로 사회의 건강을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다. 실의와 좌절보다 꿈과 희망을 안기는 정치와 그 리더십은 정녕 우리에게는 사치인가.

변상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