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핵문제」에 관심 갖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987년9월15일 미 국무성 동아시아 태평양담당 차관보인「개스턴·시거」라는 사람이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그때 한반도에 비핵지대를 설정할 것을 제의한 한 야당의 선거공약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핵무기의 존재 여부를 확인도 부인도 않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라는 것은 잘 아실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기본입장으로 남아 있다.
이것이「시거」의 대답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미국의 핵억지력 (nuclear deterrent) 이 세계의 평화에 필수적이라고 믿고 있다』고 꼬리를 달았다.
이 땅에 자기네 마음대로 갖다 놓은 핵무기 때문에 몰사의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은 바로 우리겨레인데 「확인도 부인도 않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라니 교언치고는 뻔뻔스럽기 짝이 없다. 만일 우리 한국이 미국영토 안에다 핵무기를 갖다 놓고 그와 같은 말을 했다면 그들이 납득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말한 핵 억지론은 결국 핵 대결의 이론에 불과하며 그런 무력경쟁에 의한 평화유지론은 인류의 희생을 딛고 자기네의 이익을 추구하겠다는 군산복합체적인 발상에 불과하다.
지금 한반도에 미국의 핵 병기가 배치되어 있는 것은 이제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 종류와 수량에 대해서까지도 웬만큼 알려져 있는 터다.
다만 핵전쟁에서 제일 먼저 희생당할 위험을 안고 있는 불쌍한 우리 동포들만 자세한 진상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명분상으로는 한반도의 안보를 위해서 핵의 배치가 필요하다고 하나 여기에는 유력한 반논이 나와있다.
첫째는 한반도에 배치되어 있는 핵 폭탄은 북한을 상대로 하기에는 너무나도 과다하다는 것이며, 둘째는 오히려 미국의 핵 기지를 노리는 소련의 군사적 공격의 목표가 됨으로써 도리어 참화를 받을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핵전쟁의 기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 바로 한반도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미소 어느 쪽에서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든간에 그로 인해서 희생되는 것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우리 동족일 수밖에 없고 보면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을 수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고 나면 80년대 중반이후에 국내에서 이런저런 형태의 반 핵 운동이 머리를 든 것은 너무도 당연한 깨달음의 표현이라 하겠다.
그러나 아직도 이땅의 반핵운동이 전 국민적인 차원으로 확산되지 않고 있음은 우리의 정치적.군사적 한계상황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바야흐로 반핵운동은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한 부가결의 수단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지구촌의 구석구석까지 번져나가고 있는 중이다. 미소의 지상발사 INF (중거리핵전력) 전폐조약 체결도 1981년부터 1984년에 걸쳐 불타올랐던 유럽의 반핵운동과 무관하지 않았다.
「반핵교서」 로 상징되는 미국 내 반핵의 외침도 물론 영향을 미쳤다.
이웃 일본에서는 패전의 달 8월을 온통 반핵운동의 절정기로 삼고 있다.
세계에서 맨 처음으로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자기네의 전쟁도발 책임은 제쳐두고 해마다 원·수폭 금지행사를 연다.
피해자타령을 하면서 올해도「피폭43주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가 지난 8월1일부터 9일까지 도쿄-히로시마-나가사키로 자리를 옮겨가며 열렸다.
한국에서는 이우정 선생과 필자가 처음으로 참석하였고 이애주 교수가 히로시마 대회에서한국의 젊은이들과 함께 반핵 춤판을 벌여 절찬을 받았다.
대회는 27개국, 3개의 국제조직으로부터 온 63명의 해외대표를 포함하여 일본내의 각계인사가 참가한 가운데 진지하고도 다채롭게 진행되었다.
도쿄회의 때에는 이우정 선생이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참상에 관해서 보고를 함으로써 많은 관심을 모았으며 필자는 분과토의에서 한국내의 원자력 발전소 문제를 거론하였다.
앉아서 회의만 한 것이 아니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는 1945년 당시의 원폭투하시간에 맞추어 열린 군중집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반핵 평화대행진에도 참가하였다.
전반적인 흐름은 미국에 대한 규탄일색이었다. 미국이야말로 세계평화를 위협하는「주범」이라는 식이었다. 심지여는 미국 측 참가자조차도 미국은 세계 앞에 반성해야 된다는 점을 역설하여 장내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의 핵 군사력의 강화, 「레이건」의 SDI (전략방위구상)개발 등이 비난을 사기에 알맞은 표적이었다.
폐막 때 채택된 「행동을 위한 결의」에는 무조건적이고 감시 가능한 포괄적 핵실험정지조약의 체결 등을 비롯한 여러 항목의 요망과 다짐이 포함되어 있으며 거기에는 피폭자의원호· 핵기지의 철수 등 우리 한국과 관계되는 사항도 상당한 비중으로 반영되어 있다.
외국인들도 이처럼 걱정하고있는 한반도의 핵의 위험에 대해서 정작 국내에서는 아직도 큰 목소리의 파장을 볼 수 없으니 매우 안타깝다.
이땅의 평화와 우리 민족의 안전을 위해서도 핵 문제에 관한 보다 자유스럽고도 광범한 논의가 반드시 있어야 되리라고 믿는다. <한승헌·변호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