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피첩 발견 … 다산 정약용의 삶과 사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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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전체적으로 완전해도 구멍 하나만 새면 깨진 항아리이듯, 모든 말을 다 미덥게 하다가 한마디만 거짓말해도 도깨비처럼 되니 늘 말을 조심하라."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이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 대한 당부를 적어 가르쳤던 하피첩(霞帖) 내용의 일부다.

이 첩(소책자) 넉 점 가운데 석 점이 지난달 말 발견됐다. 그리고 7일은 다산의 서거 17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최근 새롭게 조명되는 다산의 생애와 사상 등을 공부한다.

◆ 다산의 생애=정약용은 영조 38년 경기도 광주(지금의 남양주)에서 태어났다. 다산은 그의 호며, 여유당(與猶堂)으로 부르기도 한다.

16세에 실학자인 이익(1681~1763)의 학문을 접하면서 민생을 위한 경세치용(經世致用.학문은 세상을 다스리는 데 실익을 증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유학의 주장)에 뜻을 뒀고, 서학(西學)에도 눈을 뜨게 됐다.

서학에 대한 흥미는 당시 부패한 유학의 유해성을 깨닫게 했고, 서구의 과학기술에 눈을 돌리게 해 자신의 실학사상을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정조 13년(1789년)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쳤다. 관리 생활을 시작한 다산은 나라의 이익과 백성의 행복을 위한 사업에 자신의 과학 지식과 재능을 발휘했다. 또 규장각(1776년 궐 안에 설치한 국립도서관)의 편찬 사업에 참여해 많은 업적을 남겼고, 정조 16년에는 거중기(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데 사용하던 재래식 기계)를 고안해 수원화성을 축조하는 데 크게 도움을 줬다.

33세(1794년)에 경기도 암행어사로 임명된 그는 지방을 순찰하며 농촌의 궁핍상과 지방행정의 부패상을 낱낱이 목격했다. 뒷날 농민을 위한 정치.경제 개혁안을 마련하는 학문적 기틀이 이때 다져졌다.

다산은 순조 즉위 원년인 1801년에 일어난 신유사옥(천주교 박해 사건)에 연루돼 경상도 장기로 유배됐다. 그리고 같은 해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져 천주교 탄압이 더욱 심해지는 바람에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지가 바뀌게 됐다.

이 백서 사건은 황사영(1775~1801)이 신유사옥의 전말과 천주교 박해 대책 등을 비단에 적어 베이징의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된 것이다. 다산은 그 뒤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더 해야만 했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백성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학문 연구와 저술에만 전념했다. 석방돼 귀향한 뒤에도 여생을 오직 저술에 몰두해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결국 17세기 후반부터 싹튼 실학사상을 집대성해 주자학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학문으로 체계화시키기에 이르렀다.

◆ 다산의 사상=다산의 학문은 공자와 맹자 유학의 근본 정신 재현에 뿌리를 뒀다. 따라서 그는 당시 정치 이념이었던 성리학의 공리공담(空理空談.아무 소용이 없는 헛된 말)을 비판하고, 주자학적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사회 개혁안을 제시했다. 이런 태도는 농민을 착취하는 사회체제를 분석 비판해, 전제(田制)부터 세제.관제.법제.학제.병제.정치제도에 이르는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한 그의 개혁안에서 읽을 수 있다.

사상적으로 다산은 유형원(1622~1673년)과 이익을 통해 내려온 경세치용적 실학사상을 계승했다. 여기에 영.정조대 이후 청의 학술과 문물을 배우려 한 북학파의 이용후생(利用厚生.편리한 기구 등을 잘 이용해 살림에 부족함이 없게 함)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의 사상은 육경사서 등 경전 주석에 나타나는 경학 체계와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일표이서(一表二書)에 나타나는 실학 체계로 나뉜다.

경전 주석에 있어 그는 훈고적 실증을 중시하는 한학과 청나라 고증학의 경전 해석 방법을 비판적으로 도입했다.

또 서학의 과학적 사고를 수용해 객관적 사실에 대한 분석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을 통해 실용의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표이서에는 다산의 정치.경제.사회사상이 녹아 있다. 그 가운데 '경세유표'는 국가 경영에 관련된 모든 제도와 법규에 대해 기준이 될 만한 내용을 담았다. '목민심서'는 목민관인 지방관리들이 부임부터 물러날 때까지 지켜야 할 윤리강령이 담겨 있는데, 이를 통해 타락한 목민관의 정신적 자세를 바로잡으려 했다. '흠흠신서'는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중 형옥에 관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썼다.

다산은 또 민본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의 논문인 '원목'과 '탕론'에서 주권 자체가 대중에게 있고 대중에 의한 통치자의 교체는 정당하다고 봤다.

이태종 NIE 전문기자, 조종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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