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 세상의 모든 집 옛 애인의 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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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한가위 보름달을 보며 남몰래 소원을 빌었지요. 지금은 그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추억의 창을 열면 맨 먼저 서성국민학교가 보이고,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혼자 노는 소녀 하나가 있습니다. 측백나무 울타리에 숨어서 그녀를 훔쳐보던 소년이 또 하나 있고요. 지금도 콩닥콩닥 심장이 뜁니다.

대봉산에 보름달이 뜰 때도 꼭 그렇게, 콩닥콩닥 뜨지요. 그 누구의 얼굴인 듯 얼굴인 듯 차마 아무 말도 못하고,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불콰해집니다. 짝사랑의 추억도 없이 어찌 달이 뜨고 별이 뜨겠습니까. 누가 봐주지 않아도 구절초 꽃이 피고 있습니다.

세상 어디나 누군가의 고향이고, 또 누군가의 사랑과 추억의 장소입니다. 나무 하나 바위 하나 모두가 예사롭지 않지요. 봄이면 앵두꽃이 피고 가을이면 먹감이 익어가는 시골집을 촉촉이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짝사랑의 추억은 오래 묵은 포도주 같은 것. 세상의 모든 집은 그 누군가의 옛 애인의 집입니다.

이원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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