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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낭만주먹 낭만인생 16. 은인 선우휘<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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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소설가이자 언론인인 선우휘씨. 필자는 그와 16년 우정을 나눴다.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선우휘(1922~86)씨를 만난 것도 백기완 덕분이었다. 이 무식한 배추가 선우휘의 사랑을 그토록 받았다는 것, 길지 않았던 교유 16년 동안 태산 같은 믿음을 주고 받았다는 것 자체 또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너무도 다른 직업과 처지에도 불구하고 우리 둘은 형제처럼 지냈다. 가족끼리 내왕했을 정도였다. 내 삶의 고비 때마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준 사람도 바로 그다. 1974년 긴급조치 1호에 걸려 정부전복 및 간첩죄라는 죄목으로 끌려 갔을 때부터 도움을 줬다.

나중에 상세하게 말하겠지만, 강원도 철원 10만평 땅에서 '노나메기 농장'을 운영한 것은 내 삶의 한 전성기였다. 그때 느닷없이 구속됐다. 86년 '말'지 사건으로 구속되기 12년 전의 첫 구속이었지만, 그때도 고약한 간첩죄 명목이었다. 김일성과 교신했다는 말도 안 되는 혐의가 씌워진 것이다.

어쨌거나 공동체 정신을 내건 노나메기 농장에는 장준하.함석헌을 비롯해 김도현(전 문화관광부 차관).김정남(전 청와대 교문사회수석) 등 당시 재야인사들이 자주 찾아왔다. 거저 놀러온 것이 아니라 몸으로 농사일을 거들어줬던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때 신문기자로는 선우휘와 이부영 등이 농장을 찾아줬다.

나중에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부영은 빼빼 마른 몸에 독재정권 비판으로 눈에 광채가 번득이던 신출내기 동아일보 기자였다. 서울 자하문에서 신혼살림을 하던 그는 영락없는 백면서생이었지만, 나와는 여러모로 죽이 잘 맞았다. 반면 선우휘는 거물 기자였다.

조선일보 주필이었고, 덩치도 사람됨도 모두 컸다. 나보다는 13세 위이니 형님 뻘이었다. 그런 선우가 얼마나 나를 아꼈는지는 눈물겹다. 74년 간첩죄로 구속돼 서대문형무소 생활 6개월 만에 풀려난 것도 그의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선우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죄 없는 방동규란 위인을 선처해 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모양이다. "긴급조치의 무분별한 적용으로 인한 선의의 피해자는 구제돼야 한다"는 명분을 들이댔다. 박정희 면담까지도 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의 동생 선우련. 그는 당시 청와대 공보비서관이었는데, 그가 형에게 대들었다.

"형, 지금 시절이 어느 때인데 빨갱이들과 놀아? 방동규, 그 친구는 빨갱이라며? 형이 왜 나서?"

말다툼 끝에 선우는 친동생의 뺨을 냅다 갈겼다. 동생은 코피까지 터졌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은 선우의 부인이 내 아내에게 털어놓았던 말이다. 그만큼 선우는 나를 아꼈다. 저번에 말했듯 12년 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당할 때 기소유예로 보름 만에 풀려난 것에도 선우의 노력이 있었다.

그런 선우가 내가 운영했던 서울 사당동의 신발가게까지 찾아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신발 파는 호객꾼 노릇을 했었다면, 누가 믿을까? 내일 밝히겠지만, 그건 엄연한 사실이다. 친동생도 아닌 나를 위해 지식인인 그가 "골라, 골라"소리를 했던 것이다.

배추 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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