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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한 상상으로 지루한 일상 탈출

중앙일보

입력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물리학에는 '인간이 벽을 뚫을 수 있는 가능성'이 이론적으로 존재한다. 터널링 효과(Tunneling Effect)라고 불리는 이것의 확률은 10의 100제곱분의 1이다. 로또에 당첨될 수학적 확률은 8,145,060분의 1이다. 로또 당첨 확률은 서울에서 김 서방 찾을 확률보다 4배나 낮다고 한다.

프랑스 뮤지컬 '찬스'와 '벽을 뚫는 남자'는 평범했던 변호사 사무실 직원들이 로또에 당첨되고, 보통 남자였던 우체국 말단 공무원이 벽을 뚫게 되면서 겪는 이야기다. 로또에 당첨된 '찬스'의 직원들은 당첨금을 나눈 후, 해외여행을 가거나 명품 쇼핑을 하는 등 각자 꿈꿔왔던 시간을 보내지만 일하는 것보다 노는 게 더 힘들다는 깨달음을 얻고 사무실로 되돌아온다. 자유자재로 벽을 드나들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벽을 뚫는 남자' 듀티율은 '가루가루'라는 이름으로 의적활동을 하면서 흠모하던 이사벨의 마음까지 얻게 되지만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되자 그만 벽 속에 갇히고 만다.

뜻하지 않게 생긴 초능력이나 일확천금에 대한 상상은 지루한 일상을 행복하게 한다. 어릴 때 나는 날씨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싶었다. 숙제를 안 한 날엔 홍수가 나게 하고 시험날엔 태풍이 불게하고 소풍날엔 해가 지지 않게 하는 거다. 그러다 나이가 들자 '비 오게 해주세요. 가뭄 들게 해주세요' 하는 기도보다는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로또를 사는 것이 현실적임을 알게 되었다. 하여 잊지 않고 매주 천 원씩 투자했지만 5등 당첨은 고사하고 6개의 숫자 중 단 한개도 맞춰본 적이 없다.

하지만 사실 이런 것들로 인해 내 인생이 변한다면 그건 또 저어할 일이다. 가끔은 뮤지컬의 주인공처럼 돈다발을 뿌리며 아프리카를 여행하거나, 벽을 뚫고 옛 애인을 찾아가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 기막힌 행운과 함께 동반될 반작용이 두렵다. 평범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감사하지 못할 것들, 예를 들면 조카의 첫 옹알이라든가 특별한 날도 아닌데 받게 된 꽃다발 같은, 작지만 빛나는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다.

알랭 드 보통의 소설'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는 두 남녀 주인공이 파리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5840.82분의 1의 확률을 뚫고 만나는 장면이 있다. 나에게는 로또 당첨이나 벽을 뚫을 수 있는 능력보다 이런 일상의 기적이 훨씬 매력적이다. 오늘 좌석버스 옆자리에 앉은 남자와 낭만적인 로맨스에 빠지게 된다면 초능력을 향한 기도나 이번 주 로또 쯤은 건너뛰어도 괜찮지 않을까. 장유정(뮤지컬 작가 겸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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